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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의 ‘4·19북행’과 평화의 길
게시물ID : history_83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릴케
추천 : 5
조회수 : 51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4/15 20:42:52

우리 현대사에서 ‘4·19’는 두 차례의 아픈 사력을 간직한다. 카를 마르크스의 말을 패러디하면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서는 독재자 이승만을 타도한 4·19혁명은 접어두고, 1948년의 4·19를 생각한다. 아마 국민 다수는 1948년 4월19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날 아침 백범 김구 선생은 아들 신과 비서 선우진을 대동하고 승용차 편으로 거처하던 경교장을 떠나 북행길에 올랐다. 400~500명의 군중이 길을 막자 백범은 간절히 호소했다. “내 나이 70이 넘었다. 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달라. 이대로 가면 한국은 분단될 것이고,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당시 평양에서는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회의와 남북요인 15인이 참석하는 정치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남북협상의 마지막 기회였다. 백범은 옛 독립운동의 동지였던 김두봉의 집에서 열린, 남쪽의 김규식과 북쪽의 김일성, 집주인이 참여한 ‘4김회담’에 참석했다. 여기서는 △진정한 민주국가 건설 △사유재산제도의 인정 △통일중앙정부 수립 △외국군에 군사기지 불제공 △미·소 양군 철수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백범은 이 자리에서 뤼순에 있는 안중근 의사 유해 봉환, 소련군에 억류된 조만식 선생의 석방 등을 요구하였다. 김일성은 항일투쟁의 대선배 백범을 깍듯이 모셨다. 당시 백범은 73살, 김일성은 37살이었다.

백범은 5월6일 서울로 돌아왔다. 마지막 남북협상은 남쪽의 극우세력과 미국, 북쪽의 극좌파세력과 소련에 의해 무산되고, 양쪽에 두 개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분단정권이 들어서면 반드시 동족간에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던 백범의 ‘예언’은 어김없이 6·25전쟁으로 나타났다.

방북에 앞서 ‘3000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성명에서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던 백범은 분단·친일세력에 의해 암살되고, 그의 노선은 긴 세월 색깔론과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 군사정권은 남북 대결을 부추겼다.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으로 간신히 평화의 물꼬가 트이고 금강산과 개성공단이 열렸다. 그때부터 극우냉전세력은 ‘퍼주기’를 내세워 국민을 선동하고, 이명박 정권에서는 연평도 폭격 등 열전상태 그리고 박근혜 정권에서 전쟁 직전 사태를 맞게 되었다.

‘퍼주기’보다 몇백 배가 넘는 무기 수입과 ‘북한 고립’ 전략은 3차의 핵실험으로 나타나고, 남쪽 극우와 북쪽 극좌의 ‘적대공존’은 기득권을 확대하면서 전면전을 부추긴다.

“전투는 군인이 하지만 전쟁은 정치인이 한다.”(클레망소) 정치인들이 남북 군인들의 전쟁 분위기를 막아야 한다. 아무려면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평양으로 달려가 동족상쟁을 막자고 설득하는 정치인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직업 국회의원’들의 작은 그릇을 개탄한다. 우세한 군사력과 국력으로 우리가 이긴다 쳐도 수백만이 죽고 국토가 파괴된 승전에 무슨 의미를 찾겠는가.

까치는 가장 바람이 세차게 불 때 집을 짓는다고 한다. 남북관계가 가장 어려울 때 평화의 길을 찾자. 65년 전 백범의 4·19 북행정신을 살리면서 6·15와 10·4 정상회담의 합의사항을 지켜나가면 한반도 ‘평화의 봄’이 가능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명박식의 몽매한 대북정책에서 뛰어넘길 기대한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기사원문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58288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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