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 버릴 수 있다면
누가 말했었다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 강에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러면 고통도 그리움도 추억도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꽃들은 왜 빨리 피었다 지는가
흰 구름은 왜 빨리 모였다가 빨리 흩어져 가는가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가 너무도 빨리
내 곁에서 멀어져 가는 것들
들꽃들은 왜 한적한 곳에서
그리도 빨리 피었다 지는 것인가
강물은 왜 작은 돌들 위로 물살져 흘러 내리고
마음은 왜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만
흘러가는가
엄원태, 어두워질 때
금호강 방죽 위를 걷는다
해는 저물었지만
잉크병 같은 박명(薄明)의 푸른빛이 있다
오래전부터 이 시간을 사랑하였다
강변 풍경엔 뭔지 모를 이끌림 같은 게 있다
어스름이란, 마음에도 그늘처럼 미미(微微)한 흔적을 남긴다
강바닥 버드나무들은 언제부턴가 둥근 무덤들을 닮았다
그때 너를 놓아 보냈던 게
내 손아귀 안간힘이 다해서였던가,
생각하면 모래알같이 쓸쓸해지지만 여한은 없다
해오라기 하나 물에 발을 담그고 가만히 있다
저대로 밤이라도 새우려는지
가슴께에 보드라운 흰 털이 바람에 부스스 일어난다
새들도 저처럼 치명적인 상처를 가졌다
나는 가슴을 가만히 쓸어본다
버드나무에 걸린 지난 홍수의 비닐조각들은
내 등허리에도 틍증처럼 걸려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미련도 남아 있지 앟다
이제 곧 밤이다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해인, 선인장
사막에서도
나를
살게 하셨습니다
쓰디쓴 목마름도
필요한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내 푸른 살을
고통의 가시들로
축복하신 당신
피 묻은
인고(忍苦)의 세월
견딜 힘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살아 있는
그 어느 날
가장 긴 가시 끝에
가장 화려한 꽃 한 송이
피워 물게 하셨습니다
정호승, 쓸쓸한 편지
오늘도 삶을 생각하기보다
죽음을 먼저 생각하게 될까봐 두려워라
세상이 나를 버릴 때마다
세상을 버리지 않고 살아온 나는
아침햇살에 내 인생이 따뜻해질 때까지
잠시 나그네새의 집에서 잠들기로 했다
솔바람소리 그친 뒤에도 살아가노라면
사랑도 패배할 때가 있는 법이다
마른 잎새들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내가 울던 날
싸리나무 사이로 어리던 너의 얼굴
이제는 비가 와도
마음이 젖지 않고
인생도 깊어지면
때때로 머물 곳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