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택,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계단을 오르다가 발을 헛디뎠습니다
들고 있던 화분이 떨어지고
어둡고 침침한 곳에 있었던 뿌리가
흙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내가 그렇게 기억을 엎지르는 동안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내 안 실뿌리처럼
추억이 돋아났습니다
다시 흙을 모아 채워 넣고
손으로 꾹꾹 눌러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꽃잎은 말없이 흔들렸습니다
앞으로는 엎지르지 않겠노라고
위태하게 볕 좋은 옥상으로
봄을 옮기지 않겠노라고
원래 있었던 자리가 그대가 있었던 자리였노라
물을 뿌리며 꽃잎을 닦아 내었습니다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이문재, 거울
모든 빛을 통과시키기 때문에
유리창은 늘 차갑다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아서
거울은 모든것을 되비춘다
유리의 막힌 한쪽
거울의 뒤쪽
거울은 따뜻하지 않다
내 살아온 날들은
내 죽음이 함께 살아온 날들
이렇게 살아 있음의 뒤편이
바로 나의 죽음
거울의 배면
내가 죽어야 내 죽음도 죽는다
정끝별, 자작나무 내 인생
속 싶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솟은 저 서릿몸
신경줄까지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최승호, 그림자
개울에서 발을 씻는데
잔고기들이 몰려와
발의 때를 먹으려고 덤벼든다
떠내려가던 때를 입에 물고
서로 경쟁하는 놈들도 있다
내가 잠시
더러운 거인 같다
물 아래 너펄거리는
희미한 그림자 본다
그 너덜너덜한 그림자 속에서도
잔고기들이 천연스럽게 헤엄친다
어서 딴 데로 가라고 발을 흔들어도
손으로 물을 끼얹어도 잔고기들은
물러났다가 다시 온다
유홍준, 주석 없이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 때
너는 전반부 없이 이해됐다
너는 주석 없이 이해됐다
내 온몸에 글자 같은 가시가 뻗쳤다
가시나무 울타리를 나는 맨몸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가시 속에 살아도 즐거운 새처럼
경계를 무시하며
1초만에 너를 모두 이해해버린 나를 이해해 다오
가시와 가시 사이
탱자꽃 필 때
나는 너를 이해하는 데 1초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