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 모진 소리
모진 소리를 들으면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더라도
내 귀를 겨냥한 소리가 아니더라도
모진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쩌엉한다
온몸이 쿡쿡 아파온다
누군가의 온몸을
가슴속부터 쩡 금가게 했을
모진 소리
나와 헤어져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내 모진 소리를 자꾸 생각했을
내 모진 소리에 무수히 정 맞았을
누군가를 생각하면
모진 소리
늑골에 정을 친다
쩌어엉 세상에 금이 간다
천양희, 가시나무
누가 내 속에 가시나무를 심어놓았다
그 위를 말벌이 날아다닌다
몸 어딘가, 쏘인 듯 아프다
생(生)이 벌겋게 부어 오른다. 잉잉거린다
이건 지독한 노역이다
나는 놀라서 멈칫거린다
지상에서 생긴 일을 나는 많이 몰랐다
모르다니! 이젠 가시밭길이 끔찍해졌다
이 길, 지나가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라
돌아가지 않으리라
가시나무에 기대 다짐하는 나여
이게 오늘 나의 희망이니
가시나무는 얼마나 많은 가시를
감추고 있어서 가시나무인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나를
감추고 있어서 나인가
가시나무는 가시가 있고
나에게는 가시나무가 있다
마종기, 메아리
작은 호수가 노래하는 거
너 들어봤니
피곤한 마음은 그냥 더 잠자게 하고
새벽 숲의 잡풀처럼 귀 기울이면
진한 안개 속에 몸을 숨긴 채
물이 노래하는 거 들어봤니
긴 피리 소리 같기도 하고
첼로 소리인지 아코디언 소리인지
멀리서 오는 밝고 얇은 소리에
새벽 안개가 천천히 일어나
잠 깨라고 수면에서 흔들거린다
아, 안개가 일어나 춤을 춘다
사람 같은 형상으로 춤을 추면서
안개가 안개를 걷으며 웃는다
그래서 온 아침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우리를 껴안는
눈부신 물의 메아리
정호승, 산낙지를 위하여
신촌 뒷골목에서 술을 먹더라도
이제는 참기름에 무친 산낙지는 먹지 말자
낡은 플라스틱 접시 위에서
산낙지의 잘려진 발들이 꿈틀대는 동안
바다는 얼마나 서러웠겠니
우리가 산낙지의 다리 하나를 입에 넣어
우물우물거리며 씹어 먹는 동안
바다는 또 얼마나 많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겠니
산낙지의 죽음에도 품위가 필요하다
산낙지는 죽어가면서도 바다를 그리워한다
온몸이 토막토막난 채로
산낙지가 있는 힘을 다해 꿈틀대는 것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바다의 어머니를 보려는 것이다
나희덕, 석류
석류 몇알을 두고도 열 엄두를 못 내었다
뒤늦게 석류를 쪼갠다
도무지 열리지 않는 문처럼
앙다문 이빨로 꽉 찬
핏빛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네 마음과도 같은
석류를
그 굳은 껍질을 벗기며
나는 보이지 않는 너를 향해 중얼거린다
입을 열어봐
내 입속의 말을 줄게
새의 혀처럼 보이지 않는 말을
그러니 입을 열어봐
조금은 쓰기도 하고 붉기도 한 너의 울음이
내 혀를 적시도록
뒤늦게,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