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노을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서행(西行)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소각장(燒却場)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오후 6시의 참혹한 형량(刑量)
단 한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시간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상징을 몰아내고 있다
도시는 곧 활자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속도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책이 되리라
승부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오후 6시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두렵지 않은가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한 혼자였다
문득 거리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공포
보여다오.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살아있는 그대여
오후 6시
우리들 이마에도 아, 붉은 노을이 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지
아직도 펄펄 살아 있는 우리는 이제 각자 어디로 가지
김정희, 쳐들어오는 봄
봄은 그 때
마루 끝에 앉은 고양이 이마에서 막 피어나기 시작했는데
햇빛을 씹고있는 그 놈의 반쯤 닫힌 눈동자를 지나
겨드랑이를 비집고 나온 붓꽃잎을 지나
쪽마루 결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는데
몸살처럼 오소소 번지고 있었는데
바위들이 몸을 열고 있었다 그 속에서
미루나무 이파리들이 반짝이며 흘러나왔다
새끼 밴 까만 쥐들이 오목눈이새들이 불개미떼가
나는 그 속으로 아픈 몸을 구겨 넣었다
누워서
햇빛들이 두런거리는 소리 들었다
목련 우듬지를 거슬러 오르는 물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방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그리곤
속절없이 쳐들어오는 봄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경희, 발바닥으로 읽다
찌든 이불을 빤다
무거운 이불 한 채, 물에 불린다
모란 잎, 때 절은 이파리
고무통에 담그니 발바닥에 풋물이 든다
모란꽃이 쿨럭쿨럭 거품을 토해낸다
고무통 수북히 거품이 솟는다
맥을 짚듯 두 발로 더듬는다
삶에 찌든 내가 밟힌다
먼 기억 속 부드러운 섬모의 숲을 거슬러 오르자
작은 파문 일렁인다
나비 한 마리 날지 않는 행간
지난 날 부끄런 얼굴, 밟히며 밟히며
자백을 한다
좀체 읽히지 않던 젖은 문장들
발로 꾹꾹 짚어가며
또박또박 나를 읽는다
눈부신 햇살 아래 모란꽃 젖은 물기를 털어 낸다
어디선가 날아든 노랑나비 한 마리
팔랑팔랑 꽃을 읽고 날아간다
강연호, 바닥
그는 지금 여기가 바닥이라고 생각한다
더는 밀려내려갈 곳이 없으므로
이제 박차고 일어설 일만 남은 것 같다
들끓는 세상이 잠시 식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갈증은 그런 게 아니다
바닥의 바닥까지 내려가
여기가 바로 밑바닥이구나 싶을 때
바닥은 다시 천길 만길의 굴욕을 들이민다는 것을
굴욕은 굴욕답게 캄캄하게 더듬어 온다는 것을
그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 저어보지만
스스로를 달래기가 그렇게 쉬운 게 정말 아니다
그는 바닥의 실체에 대해
오래 전부터 골똘히 생각해온 듯하다
그렇다고 문제의 본질에 가까워진 것은 아니지만
바닥이란 무엇인가
털썩 주저앉기 좋은 곳이다
물론 그게 편안해지면
진짜 바닥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이정록, 희망의 거처
옥수숫대는
땅바닥에서 서너 마디까지
뿌리를 내딛는다
땅에 닿지 못할 헛발일지라도
길게 발가락을 들이민다
허방으로 내딛는 저 곁뿌리처럼
마디마다 맨발의 근성을 키우는 것이다
목 울대까지 울컥울컥
부젓가락 같은 뿌리를 내미는 것이다
옥수수밭 두둑의
저 버드나무는, 또한
제 흠집에서 뿌리를 내려 제 흠집에 박는다
상처의 지붕에서 상처의 주춧돌로
스스로 기둥을 세운다
생이란
자신의 상처에서 자신의 버팀목을
꺼내는 것이라고
버드나무와 옥수수
푸른 이파리 눈을 맞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