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세실리아, 인사동 밭벼
인사동에서
발목까지 잘박잘박 눈물로 차 오른 밭벼를 보았다
숙련공처럼 씨알마다 포말 가득 채우고도
정갈한 바람 한 점 수태시키지 못해
뒤엉켜 쓰러지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기립의 슬픈 생애을 보았다
이 시대 깨어있는 자들의 전생이
고서상 목선반 묵은 먼지되어
더께 낀 전설쯤으로 휘어져 버린 저 길목 어디쯤에
산길 먼 촌동네 전구알같은 벼이삭
그 새끼친 알곡의 조각난 꿈을 보았다
추분(秋分) 넘긴 파리한 살갗
겨울갈이 꽃배추에게 몇 뼘 밭뙈기 내어 주고
종로구청 쓰레기 수거 차량 잡쓰레기에 몸 섞기 전
누군가 밤새 몰래 베어다가 새벽 말간 물에 불려
지상의 어떤 아름다운 단 한 사람을 위한
이승의 밥으로 지어져 주발에 고봉으로 담겨지기를
지하철 3호선 대화행 막전철이 오고 있다. 저기
사람들이 타고 또 내린다
정지용, 고향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김윤이, 트레이싱 페이퍼
잘 마른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네 나를 읽네
몇 장 겹쳐도 한 장의 생시 같은
서늘한 바람 뒤편
달처럼 떠오른 내가 텅 빈 아가리 벌리네
지루한 긴긴 꿈을 들여다봐주지 않아 어둠이 흐느끼는 밤
백태처럼 달무리 지네
일순간 소낙비
가로수 이파리, 눈꺼풀이 축축하게 부풀어 오르고
거리마다 지렁이가 흘러넘치네
아아 무서워 무서워
깨어진 잠처럼 튀어 오른 보도블록
불거져 나온 나무뿌리
갈라진 혓바닥이 배배 꼬이네
비명이 목젖에 달라붙어 꿈틀대네
나는 이 길이 맞을까 저 길이 맞을까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고 싶지만
손금이 보이지 않는 손
금 밟지 않기 놀이하듯 두 다리가 버둥대네
두 동강난 지렁이 이리저리 기어가고
구름을 찢고 나온 투명한 달
내 그림자는 여태토록 나를 베끼고 있네
박인숙, 침엽의 생존방식
활엽을 꿈 꾼 시간만큼 목마름도 길어
긴 목마름의 절정에서 돋아난 가시들
침엽은 햇살도 조금 바람도 조금
마음을 말아 욕심을 줄인다
대리운전하는 내 친구 금자
밤마다 도시의 휘청임을 갈무리 하는 사이
보도 블록 위에 포장마차로 뿌리 내린 민수씨
그들은 조금 웃고 조금 운다
바람 속에 붙박혀 시간을 견디는 일이
침엽의 유전자를 가진 자들의 몫이므로
뾰족이 가둔 눈물이 침엽의 키를 늘이고
세월을 새겨 가는 것
그들의 계절에는 극적인 퇴장
화려한 등장 따위는 없다
한가한 날 고작 흰 구름 몇 가닥 바늘 끝에 걸쳐두거나
흐린 겨울 하늘이 너무 시릴 때
눈꽃으로 피사체를 만들어 보거나
혹한의 계절에도 홀로
숲의 푸른 내력을 지키는 건 침엽이다
그들의 날카로운 생존방식이 숲을 깨우고
바람의 깃털을 고른다
햇살도 이 숲에선 금빛으로 따끔 따끔 빛난다
도종환, 인연
너와 내가 떠도는 마음이었을 때
풀씨 하나로 만나
뿌린 듯 꽃들을 이 들에 피웠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떠돌던 시절의 넓은 바람과 하늘 못 잊어
너 먼저 내 곁을 떠나기 시작했고
나 또한 너 아닌 곳을 오래 헤매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도 가없이 그렇게 흐르다
옛적 만나던 자리에 돌아오니
가을 햇볕 속에 고요히 파인 발자국
누군가 꽃 들고 기다리다가 문드러진 흔적 하나
내 걸어오던 길쪽을 향해 버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