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경, 얼음
얼음들이 하얗게 밀린다
작은 고래떼처럼 엎드려
어디서 태어나는지도 모르는데
한강의 추운 바람 속을 울고 있다
밤이면 듣는다
새파란 수심 위에서 갈라지는 투명한 얼음들의 소리
바람에 밀리며 겹치고 겹치어
아침마다 하얗게 반짝이는 등허리로
우리의 머리맡에 자욱히 일어선다
빛이란 빛은 모두 토해내는
결백한 슬픔
소금처럼 단단하게 웅크리다가
녹아서 이름없이 흐르는 강물이 된다
새파란 수심 위에서
투명한 얼음들이 갈라진다
김용택, 11월의 노래
해 넘어가면
당신이 더 그리워집니다
잎을 떨구며
피를 말리며
가을은 자꾸 자고
당신이 그리워
마을 앞에 나와
산그늘 내린 동구길 하염없이 바라보다
산그늘도 가 버린 강물을 건넙니다
내 키를 넘는 마른 풀밭들을 헤치고
강을 건너
강가에 앉아
헌옷에 붙은 풀씨들을 떼어내며
당신 그리워 눈물 납니다
못 견디겠어요
아무도 닿지 못할
세상의 외롬이
마른 풀잎 끝처럼 뼈에 와 닿습니다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에게 가 닿고 싶은
내 마음은 저문 강물처럼 바삐 흐르지만
나는 물 가버린 물소리처럼 허망하게
빈 산에 남아
억새꽃만 허옇게 흔듭니다
해 지고
가을은 가고
당신도 가지만
서리 녹던 내 마음의 당신 자리는
식지 않고 김 납니다
김기림, 바다와 나비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어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김지하, 늦가을
늦가을
잎새 떠난 뒤
아무 것도 남김 없고
내 마음 빈 하늘에
천둥소리만 은은하다
이원규, 시를 쓰는 가을밤
탱자나무가 걸어온다
탱자나무 울타리가 몰려온다
내가 온전히 가지 못하니
저들이 먼저 가시의 혀를 내밀며
슬슬 시비를 걸어오는 것이다
탱자씨, 뿌리, 나무, 이파리, 가시, 꽃, 탱자
쓰고 또 쓰다가
볼펜 한 자루로 이백자 원고지
백여덟장을 메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가을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