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부터 말하자면 백제와 일본 그러니까 왜는 동맹국입니다.
제가 아래 글에서 친 백제적 성향이 아님을 주장한것은 일본이 독자적인 정권이 아닌 백제의 식민지 내지 그에 준하는 지역설을 주장하시는 분들의 의견처럼 괴뢰정권적인 체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칠지도를 근거로 식민지 내지 그에 준하는 지역설의 주장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사품인것은 맞다는게 제 생각이지만 그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간단하게 사례를 하나 들자면 백제나 신라, 고구려와 같은 삼국은 중국의 국가들에게 조공을 바치고 관직을 하사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삼국시대는 중국의 괴뢰 정권들의 분합시대인가요?
서론이 길었는데 본론을 적어보자면 아랫 글에서 특히나 오해를 살법한 부분이 사이메이 천황 이후의 행보라고 보입니다, 분명 사이메이 천황은 수백척의 병선과 수만의 병력을 단시간내에 급격하게 모으며 이해할수 없는 행보를 보입니다, 그러나 출병식은 보지 못하고 죽고 그 바톤은 아들인 훗날의 덴지 천황에게 넘어갑니다.
그 뒤 역사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백강 전투를 비릇한 참담한 결과로 이어지게 되는데 사실 바로 백강 전투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662년 1월에는 화살 10만 척과 곡식 종자 3천 석을 , 두 달 뒤인 3월에는 추가로 피륙 300단을 지원하는등 처음에는 간접적인 물자 지원을 이어나갔습니다, 물론 간접적이라고는 하나 사실상 군수 체제가 마비된 백제 부흥군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선물이었지요,
이 와중에 일본이 원병을 보내게 될 결정적인 사건이 북쪽에서 터집니다.
연개소문이 평양 근교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당 군이 신라의 지원을 받아 겨우 전멸을 피한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이 와중에 부흥군 내부의 갈등으로 전권을 잡고 있던 복신이 부여풍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때 부여풍은 다시 왜와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게 되며 고구려와 백제가 함께라면 신라와 당을 상대할만 하다는 판단을 내린 왜는 원병을 직접적으로 파병하기에 이르르지만 아시겠지만 당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은 전술적으로 또 병사들과 군선의 질적 차이의 문제 등으로 백강에서 패배를 하게되며 사실상 백제 부흥 운동의 종말을 고하게 되지요,
나당 연합군 이전의 상황을 본다면 이러한 동맹국으로서의 왜의 입장은 더욱 커집니다.
가령 6세기 말 고구려는 쇼도쿠 태자의 스승으로 승려 혜자를 보내 대왜 관계를 안정시키려 경주하였고 신라 역시 645년에 김춘추나 이후에 사찬 지만을 왜에 보내는 등 대일 외교는 당시 삼국으로서 중요한 일중 하나였습니다.
다만 신라의 대일 외교는 당나라가 고구려가 아닌 백제를 공격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던데다 급속도로 당풍화가 이루어지는것을 경계하여 실패했을따름인데, 고토쿠 천황 2년에는 사찬 지만이 왜에 사절로 오자 신라 정벌까지 이야기가 흘러나올 정도였지요,
여기서 일본 서기라는 사료가 참 걸리는 부분입니다.
프로파간다라는 입장에 걸맞게 허무 맹랑한 부분도 많지만 반면 당시 한반도의 역사를 그 어떠한 사서보다 자세히 한반도와 중국의 사서들을 참조로 했다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 보일정도로 다루고 있기에 복어라는 학계의 비유가 틀린 애기가 아닐정도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그렇다고 해서 신라에 반하는 태도를 유지했나 보면 그것도 아닙니다. 660년 부여풍의 반환 요구에 대하여 1년여를 고심했던 것과 다르게 이후에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양쪽 자료를 종합해보면 670년부터 779년까지 한 세기 동안 신라 사신들이 일본에 39차례나 파견되었으며 같은 기간에 일본 사신들은 신라를 25차례 방문했습니다. 그 기간에 당나라로 견당사를 보낸 것은 불과 10차례에 불과했던것을 본다면 이후의 외교 파트너로 신라를 택했다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는 두가지 정도로 축약해 볼수 있습니다, 수백년간 대륙과의 연결통로 역할을 하던 백제를 상실한 이후 경제적인 이득을 취함에 있어 신라가 당보다 더욱 매력 있으며 왜와 신라는 같은 세습 귀족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다해서 신라가 최선의 외교 파트너 였나 보면 그것은 아닙니다,
비록 역량이 부족해 약소했지만 발해의 사신이 왜에 온 이후에 국력의 격차를 가늠한 왜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도 하였으며 오랜 기간 도래인들과 원주민들간에 축적되어진 반 신라적 가치관과 더불어 최상의 정치적 모델로 여겨지던 당의 그것을 따라 관념적 번국론을 들어 신라를 번국으로 지칭하고 있었으니 말이지요.
이처럼 일본은 분명한 자국의 가치관과 외교관에 따라 국정을 운영했음을 볼때 일본과 백제의 관계는 번국 내지 속국이나 괴뢰국이 아닌 대등한 동맹적 관계에서 (비록 국력이나 문화 격차가 분명했지만 ) 교류를 했다고 볼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