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부,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
이제 비로소 길이다
가야 할 곳이 어디쯤인지
벅찬 가슴들 열어 당도해야 할 먼 그곳이
어디쯤인지 잘 보이는 길이다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가로막는 벼랑과 비바람에서도
물러설 수 없었던 우리
가도 가도 끝없는 가시덤불 헤치며
찢겨지고 피흘렸던 우리
이리저리 헤매다가 떠돌다가
우리 힘으로 다시 찾은 우리
이제 비로소 길이다
가는 길 힘겨워 우리 허파 헉헉거려도
가쁜 숨 몰아쉬며 잠시 쳐다보는 우리 하늘
서럽도록 푸른 자유
마음이 먼저 날아가서 산 넘어 축지법!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이제부터가 큰 사랑 만나러 가는 길이다
더 어려운 바위 벼랑과 비바람 맞을지라도
더 안 보이는 안개에 묻힐지라도
우리가 어찌 우리를 그만 둘 수 있겠는가
우리 앞이 모두 길인 것을
이재무, 종소리
오래 우려낸 침묵 동그랗게 퍼져서 간다
저 소리 어찌 저토록 맑고 깊을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두툼한 손길 닿는 곳마다
새순은 불쑥 키가 자라고
또래끼리 왁자지껄 떠들며 흐르는 냇물
쑥스러워 한 박자 숨소리 낮추는 것을
꽃들은 홍조를 띠며 더욱 붉어가고
가지에 걸터앉은 꽁지 짧은 새
서산 낙일에 눈시울 붉어지는 것을
고달픈 한 생애가 소리의 원 안에 들어와
귀를 씻고 제 안을 골똘히 들여다보는
다 늦은 저녁 천년 잠 든 돌 고요히 눈을
뜬다 저 자애로운 소리의 상호 앞에서
누군들 열린 단추 여미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바다에 다 와가는 강물처럼 당신은
산사 떠나 숲 사이 우렁우렁 걸어오셔서
빠진 이처럼 춥게 서 있는
마을의 지붕 위에 괜찮다, 괜찮다고
잔기츰 흩뿌리신다
이형기, 돌베개의 시
밤엔 나무도 잠이 든다
잠든 나무의 고른 숨결소리
자거라 자거라 하고 자장가를 부른다
가슴에 흐르는 한 줄기 실개천
그 낭랑한 물소리 따라 띄워보낸 종이배
누구의 손길인가, 내 이마를 짚어주는
누구의 말씀인가
자거라 자거라 나를 잠재우는
뉘우침이여
돌베개를 베고 누운 뉘우침이여
정호승, 겨울날
물 속에 불을 피운다
강가에 나가 나뭇가지를 주워
물 속에 불을 피운다
물 속이 추운 물고기들이
몰려와 불을 쬔다
멀리서 추운 겨울을 보내는
솔씨 하나 날아와 불을 쬔다
길가에 돌부처가 혼자 웃는다
박정원, 바람이 불어와 너를 비우고 지나가듯
기다림은 그대로 좋은 것
바람이 불어와 너를 비우고 지나가듯
매듭짓지 마라
있는 그대로 마음 그대로
영원 속에 머물 존재리니
지금 네가 움켜쥐고 있는 너는
언젠가 영원으로 돌려보내야 할
작은 빛이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