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가을볕
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린다
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며 눈부시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난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최문자, 닿고 싶은 곳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
꽉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온다
종종거리다가
입술을 대고 싶은 슬픈 땅을 찾는다
죽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서 있다
아름다운 듯 서 있다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들고
정신의 땀을 흘리고 있다
정철훈, 북방
내 처의 고향은 가지 못하는 땅
함흥하고도 성천강 물맞이 계곡
낙향하여 몇 해라도 살아보재도
내 처의 고향은 닿지 못하는 땅
그곳은 청진으로 해삼위로 갈 수가 있어
싸구려 소주를 마시는 주막이 거기 있었다
솔개가 치운 허공에 얼어붙은 채
북으로 더 북으로 뻗치는 산맥을 염원하던 땅
단고기를 듬성 썰던 통나무 도마가 거기 있었다
등짝짐에 철모르는 아이를 묶고
우쑤리로 니꼴스끄로 떠나갈 때
바람도 서러운 방향으로 휘돌아치고
젊은 장인이 불알 두쪽에
맨주먹을 흔들며 내려오던 땅
울타리콩이 새끼를 치고
홀로 국경을 지키는 오랑캐꽃이 거기 있었다
김지하, 빗소리
빗소리 속엔
침묵이 숨어 있다
빗소리 속엔
무수한 밤 우주의 침묵이
푸른 별들의 가슴 저리는 침묵이
나의 운명이 숨어 있다
빗소리 속엔
미래의 리듬이
사산된 채로 드러나
잿빛 하늘에 흔적을 남기던
옛사랑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침묵으로 나직이 공모하듯
숨어 있다
빗소리는 그러나
침묵을 연다
숨어서
숨은 내게 침묵으로 연다
나의 침묵을 연다
이시영, 내관(內觀)
나를 죽여
내 안의 나를 심화, 확장하는 일
나를 죽여
내 안의 내 마른 나뭇가지에 동백 두어 송이 후끈하게 피워올리는 일
나를 죽여
싸락눈 때리는 날
내 마음의 빈 대숲에 푸른 칼날 수천 개를 일렁이게 하는 일
낮은 바람에도 저를 향해 부드럽게 구부러지게 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