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표절
우리는 매일 표절시비를 벌인다
네 하루가 왜 나와 비슷하냐
내 인생이
네 사랑은
그렇고 그런 얘기들
밤 전철에서 열 사람이 연이어 옆사람
하품을
표절한다
김영무, 수술 이후
허파 한쪽 잘라낸 후
추수 끝난 논바닥에 괸 물 속
붕어처럼
모로 누워서 흘끗
석양 비낀 하늘 한쪽 곁눈질한다
구름장 시꺼멀수록
저녁놀은 어기여차 더욱 붉더라
도종환, 쓸쓸한 세상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
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
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
파도는 그치지 않고 제 몸을 몰아다가 바위에 던지고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글 한 줄을 씁니다
사람들도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하고
이 세상 가득 그대를 향해 눈이 내립니다
김현승. 무등차(無等茶)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 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는
남쪽 11월의 긴 긴 밤을
차 끓이며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김선우, 사랑의 거처
살다보면 그렇다지
병마저 사랑해야 하는 때가 온다지
치료하기 어려운 슬픔을 가진
한 얼굴과 우연히 마주칠 때
긴 목의 걸인 여자
나는 자유예요 당신이 얻고자 하는
많은 것들과 아랑곳없는 완전한 폐허예요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눈
나는 텅 빈 집이 된 듯했네
살다보면 그렇다네 내 혼이
다른 육체에 머물고 있는 느낌
그마저 사랑해야 하는 때가 온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