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철, 뿌리
이 푸른 잎을
제 진심이라 생각지 마시고
이 늘어진 가지를
제 기쁨이라 생각지 마소서
그대 눈에 마냥 푸른 빛 보이려고
그대 마음에
마냥 우거진 행복만을 비추려고
이렇게 흙빛으로
천 갈래 만 갈래 속이 탔습니다
김용호, 너 생각뿐
삼삼 그리면
눈을 부비어 보고
하두 보고프면
쩔래쩔래 머리를 뒤흔들어도 보고
못 이루는 사랑일 바엔
아예
지우고 잊어버리자
하고, 어제도 오늘도
너 생각뿐
박영근, 길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최종천, 없는 하늘
새는 새장 안에 갇히자마자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새는
의미가 아니어도 노래했지만
의미가 있어야 노래한다
하늘과는 격리된 날개
낱알의 의미를 쪼아 보는 부리
새의 안은 의미로 가득하다
새는 무겁다
건강한 날개로도
날 수가 없게 되었다
주저앉은 하늘 아래에서
욕망을 지고 나르는
인간의 등이 휘어진다
임영조, 자서전
1943년 10월 19일 밤
하나의 물음표(?)로 시작된
나의 인생은
몇개의 느낌표(!)와
몇개의 말줄임표(……)와
몇개의 묶음표( < > )와
찍을까 말까 망설이다 그만둔
몇개의 쉼표(, )와
아직도 제자리를 못찾아 보류된
하나의 종지부(. )로 요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