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별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그대를 만나러 팽목항으로 가는 길에는 아직 길이 없고
그대를 만나러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는 아직 선로가 없어도
오늘도 그대를 만나러 간다
푸른 바다의 길이 하늘의 길이 된 그날
세상의 모든 수평선이 사라지고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이 통곡하고
세상의 모든 등대가 사라져도
나는 그대가 걸어가던 수평선의 아름다움이 되어
그대가 밝히던 등대의 밝은 불빛이 되어
오늘도 그대를 만나러 간다
한 배를 타고 하늘로 가는 길이 멀지 않느냐
혹시 배는 고프지 않느냐
엄마는 신발도 버리고 그 길을 따라 걷는다
아빠는 아픈 가슴에서 그리움의 면발을 뽑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짜장면을 만들어주었는데
친구들이랑 맛있게 먹긴 먹었느냐
그대는 왜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는 것인지
왜 아무리 보고 싶어 해도 볼 수 없는 세계인지
그대가 없는 세상에서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잊지 말자 하면서도 잊어버리는 세상의 마음을
행여 그대가 잊을까 두렵다
팽목항의 갈매기들이 날지 못하고
팽목항의 등대마저 밤마다 꺼져가는
나는 오늘도 그대를 잊은 적 없다
봄이 가도 그대를 잊은 적 없고
별이 져도 그대를 잊은 적 없다
오탁번, 고란사에서
고란사 뒤안 절벽 바위 틈에서
한사코 몸을 숨기는
눈썹만한 그대여
낙화암 푸른 전설 다 안다는 듯
천년 묵은 소나무는
굵은 뿌리를 바윗가에 드러내고
강물결 춤출 때마다
금빛 솔잎 따갑게 흔들리는데
눈씻고 보아야
겨우 눈에 띄었다가는
햇빛 비치면 다시 몸을 숨기는
고란초여
이제는 다 흘러가버린
천년 전의 사랑
아직도 못 잊겠다는 듯
그늘에 숨어서도
제 모습 부끄럽다 하네
비에 젖은 눈썹 훔치며
목숨과 바꾼 사랑
남 몰래 속삭이고 있네
유재영, 꽃과 관련하여
꽃은 수직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은
꽃의 패배를 의미한다
바람의 곡선을 따라
떨어지는 꽃의 영광
지금 바람은
오직 한 점의 꽃을 위하여
곡선으로 존재한다
떨어지는 꽃잎을 받기 위하여
누워 있는 풀잎의 일생
그러나 바람은 아직 불지 않았다
정희성,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나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 한 빛나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김광규, 묘비명(墓碑銘)
한 줄의 시는 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굿굿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 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