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사랑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박성우, 망해사
심포에는 바다에 몸을 던지려다가
문득, 머리를 깎은 뒤
제 스스로 절이 된 망해사가 있다
시퍼렇게 깎은 머리를 한 채
벼랑 끝에 가부좌 틀고 앉아 수행하는
망해사 낙서전이 있다
망해의 생살을 밀고 나온
검붉은 사리 하나 서해로 떨어진다
닮아진 염주처럼 떠 있던 고군산열도
바닷물 붉게 그 사리를 닦는다
잘 씻겨진 보름달이 젖은 채로
곧 올려질 것이다
나희덕, 어린것
어디서 나왔을까 싶은 산길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맑은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어린것들은
내 앞에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젖이 차올라 겨드랑이까지 찡해오면
지금쯤 내 어린 것은
얼마나 젖이 그리울까
울면서 젖을 짜버리던 생각이 문득 난다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난만한 그 눈동자
너를 떠나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고
갈 수도 없다고
나는 오르던 산길을 내려오고 만다
하, 물웅덩이에는 무사한 송사리떼
김민형, 문학교실
섬에서 번갯불이 길을 비추었다
그의 안내를 따라 산책을 했으나
그런 길이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 길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교실에서 폭력을 행사해선 안 된다고
육체적 상상력을 뛰어넘는 폭력은 용납될 수 없다고
한 시인이 말했다
생각이 끝난 자리에서 산책은 시작되었다
화려하게 발광(發光)하는 밤의 해안을 바라보며
비가 퍼붓는 숲 속을 거닐었다
벼락이 떨어지는 미학의 절벽을
교실에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번개의 길을 따라갔다
최승자, 청계천 엘레지
회색 하늘의 단단한 베니아판 속에는
지나간 날의 자유의 숨결이 무늬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청계천엔
내 허망의 밑바닥이 지하 도로처럼 펼쳐져 있다
내가 밥 먹고 사는 사무실과
헌책방들과 뒷골목의 밥집과 술집
낡은 기억들이 고장난 엔진처럼 털털거리는 이 거리
내 온 하루를 꿰고 있는 의식의 카타콤
꿈의 쓰레기더미에 파묻혀
돼지처럼 살찐 권태 속에 뒹굴며
언제나 내가 돌고 있는 이 원심점
때때로 튕겨져 나갔다가 다시
튕겨져 들어와 돌고 있는 원심점
그것은 슬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