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무산, 창림사지
석탑 하나 마주 하고서
저물도록 그 앞을 떠나지 못합니다
오늘에사 처음 본 탑이지만
탑은 나를 천년도 넘게 보아온 듯
탑 그림자가 내 등을 닮았습니다
수억 광년 먼 우주의 별들도 어쩌면
등 뒤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석탑 하나 마주하고 오래 서 있자니
나의 등이 수억 광년 달려와
나를 정렬하고 마음을 만납니다
옛사람들은 거울보다 먼저
마음을 비춰보는 돌을 발명하였습니다
안상학, 맹인부부
길을 보지 못하는 그들이
길을 묻는다. 침술원이 어디냐고
길을 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저기 있어요. 손으로 가리키다가
말문이 막힌다
소매를 잡고 길을 간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눈을 감아본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살면서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엄살 떤 적 있었던가
침술원 문을 열고 들어서니 캄캄하다
귀를 쫑긋 세우는 맹인 침술사
불도 켜지 않은 채
맹인부부의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눈다
거리로 나서는 순간 눈앞이 캄캄하다
햇살이 더 어둡다
이성복,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푹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한용운, 복종(服從)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오세영, 눈
순결한 자만이
자신을 낮출 수 있다.
자신을 낮출 수있다는 것은
남을 받아들인다는 것
인간은 누구나 가장 낮은 곳에 설 때
사랑을 안다
살얼을 에는 겨울
추위에 지친 인간은 자신만의
귀가길을 서두르는데
왜 눈은 하얗게 하얗게
내려야만 하는가
하얗게 하얗게 혼신의 힘을 기울여
바닥을 향해 투신하는 눈
눈은 낮은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녹을 줄을 안다
나와 남이 한데 어울려
졸졸졸 흐르는 겨울 물소리
언 마음이 녹은 자만이 사랑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