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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비잔티움 제국사 (26) 콤네누스 왕조
게시물ID : history_83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4
조회수 : 134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4/13 14:05:03

http://cafe.daum.net/shogun의 푸른 장미님이 쓰신 글입니다.

미카일 6세의 재위는 1년을 채우지 못했다. 1057년 봄 군부에서 황제를 폐위하고 군인 출신의 황제를 세우자는 결의가 이루어졌다. 당연히 총사령관 이사키우스 콤네누스가 뽑혔고 소아시아의 군대가 1057년 6월 8일 그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 소식이 콘스탄티노플에 전해지자 원로원은 미카일 6세에게 황위 포기를 강요했고 미카일 6세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 하기아 소피아로 피신했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받았으며 얼마 못 가서 세상을 하직했다.


이사키우스 콤네누스는 1057년 9월 1일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했는데 미카일 프셀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콘스탄티노플의 모든 주민들이 쏟아져 나와 그를 맞이했다. 그가 신이라도 되는 듯 횃불을 치켜든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의 머리 위로 향수를 뿌렸다. 모두들 자신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그를 기쁘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예외 없이 모두들 이날을 축일로 여겼다.

도처에 춤과 환희가 넘쳤고 …… 나는 평생 그러한 화려한 축제를 본 적이 없었다. 그 행복한 무리에는 콘스탄티노플 주민과 원로원 의원, 농부, 상인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학대학 학생, 산꼭대기에 사는 사람, 바위 무덤으로 들어간 은거자(隱居者), 공중에 사는 이들까지 참여했다. 암굴에서 나온 이, 공중에서 내려온 이, 높은 산에서 내려온 이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도시로 입성하는 황제의 행렬을 도저히 잊지 못할 장관으로 만들었다.

이사키우스는 즉시 완전 개각을 단행하여 그동안 문치 정책에 의해 밀려났던 군부 세력을 강화했다. 그는 마자르족의 침공을 저지하고 1059년 도나우 강을 건너 쳐들어온 남러시아 평원 출신의 유목민족 페체네그족을 섬멸하는 원정도 승리로 이끌어 제국의 아시아쪽과 유럽 쪽 국경을 성공저으로 지켰다. 그러나 원정에서 승리를 거둔 해 말에 사냥을 나갔다가 걸린 감기가 폐렴으로까지 진행되더니 그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이사키우스는 죽음을 앞두고 후계자를 결정해야 했는데 가장 유력한 후보는 그의 동생 요하네스였다. 그러나 군인 지주 귀족들이 자신들의 대표 콘스탄티누스 두카스를 새 황제로 세우도록 그를 설득했다. 그리하여 두카스가 1059년 11월 23일 콘스탄티누스 10세로 즉위했다. 황위에서 물러나 수도원으로 들어간 이사키우스는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사키우스가 죽자 그의 동생 요하네스 콤네누스는 아내 안나 달라세나와 여덟 자녀를 거느리고 은둔했다. 요하네스가 1067년경에 사망한 뒤 안나는 장군이 된 세 아들 마누엘, 이사키우스, 알렉시우스와 함께 두카스 가문으로부터 황권을 되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한편 콘스탄티누스 10세는 즉위 후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와 재혼했는데 프셀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에우도키아는 “대단히 정력적이고 미모가 눈부신 여자”로 황제에게 일곱 자녀를 안겨주었다. 콘스탄티누스 10세는 황제로서는 너무도 무능했다. 그는 신뢰할 수 없는 외국 용병들을 고용하고 군사력을 소홀히 했으며 관료들이 이사키우스의 개혁 이전처럼 부패하도록 방치했다. 그 결과 정부와 군대가 심각하게 약화되었는데 이 시기에 비잔틴 제국은 강력한 새 적들의 부상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 족이 남이탈리아를 침공했고 페르시아를 정복한 셀주크 투르크족이 소아시아로 깊숙이 침투하여 그곳을 침략 거점으로 삼았다.

1066년은 하늘이 불타오르는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유명한데 후세에 이것은 핼리 혜성의 출현으로 밝혀졌지만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몰락의 징조처럼 보였다. 콘스탄티누스 10세는 중병에 걸렸고 그는 임종의 자리에서 아내 에우도키아를 후계자로, 16세의 아들 미카일을 공동 황제로 선언했다. 또한 동생인 카이사르 요하네스를 자신의 자녀들의 후견인으로 임명한 뒤 1067년 5월에 눈을 감았다.

그리하여 에우도키아는 황위에 올라 명목상의 공동 황제인 아들 미카일과 함께 제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해가 가기 전에 그녀는 콘스탄티누스 10세에 의해 추방되었던 로마누스 디오게네스 장군과의 결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로마누스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자 1068년 1월1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고 같은 날 새 황제 로마누스 4세가 탄생했다.

로마누스는 즉시 제국의 군대를 개편하고 셀주크 투르크족을 물리치기 위해 1068년과 1069년에 원정을 떠났다. 1071년 여름, 그는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 위해 야심만만하게 출정했으나 8월 26일 동 아나톨리아의 만지케르트에서 셀주크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 참패하여 사실상 군대가 전멸당했다. 로마누스 4세는 알프 아르슬란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제국의 남동쪽 속주들을 양도하고 해마다 거금의 보상금을 바친다는 조건 아래 풀려났다. 그리고 바로 그해에 노르만족은 이탈리아에 남아 있던 비잔틴 제국의 영토를 모조리 점령했다.

만지케르트에서의 참패 소식이 콘스탄티노플에 전해지자 로마누스 4세가 돌아오기 전에 카이사르 요하네스 두카스가 정권을 잡았다. 그는 조카 미카일 두카스를 단독 황제로 선언하고 황후 에우도키아는 작고한 이사키우스의 제수 안나 달라세나와 함께 추방했다. 요하네스 크시필리누스 총대주교가 1071년 10월 24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새 황제 미카일 7세의 대관식을 집행했다.

한편 로마누스는 황권을 되찾기 위해 세력을 규합했지만 결국 체포되어 두 눈을 잃었다. 그리고 수도원에 유폐되었다가 1072년 8월 4일 숨을 거뒀다.

미카일 7세는 즉위 직후 그루지아의 왕 바그라트 4세의 딸 마르타 공주와 결혼했으며 마르타는 마리아로 개명했다. 그녀는 알라니족의 마리아로 널리 알려졌는데 그건 그녀가 알라니족 공주라는 잘못된 상식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아들 하나만을 얻었는데 이름은 콘스탄티누스였다. 미카일 7세는 1078년 봄 니케포루스 보티니아테스 장군에 의해 축출되었다. 목숨을 건진 미카일 7세는 수도가 되어 12년을 더 살았고 마리아는 그와의 결혼이 무효화된 상태에서 아들 콘스탄티누스와 함께 수도원으로 피신했다. 1078년 3월 24일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보티니아테스는 같은 날 하기아 소피아에서 니케포루스 3세로 태어났다.

니케포루스는 황위에 올랐을 때 이미 70 후반의 나이였다. 그는 무자식의 홀아비였기 떄문에 후계자를 갖기 위해 마리아에게 청혼했다. 마리아는 아들을 황제 자리에 앉히기 위해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결혼 후 니케포루스가 콘스탄티누스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지 않자 그녀는 안나 달라세나의 아들 알렉시우스 콤네누스와 공모했다. 알렉시우스는 서유럽 영통의 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후 1078년 카이사르 요하네스 두카스의 손녀딸 이레네 두키나와 결혼하여 콤네누스 가문과 두카스 가문의 막강한 결합을 이루어낸 인물이었다.


알렉시우스 콤네누스가 1081년 황권을 거머쥐기 위한 행보를 시작했을 때 요하네스 두카스는 뒤에서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그해 4월 1일 요하네스 두카스는 콘스탄티노플 성문을 지키는 독일 용병들을 매수하여 알렉시우스와 그의 군대를 통과시키도록 했고 그 덕에 알렉시우스는 빠르게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니케포루스는 폐위되어 수도원에 유폐되었고 바로 세상을 떠났다.


1081년 4월 4일 새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등극했다. 그때 그는 24살이었고 그의 아내 이레네는 15살이 채 안 된 나이였다. 그들은 아들 넷과 딸 다섯을 얻게 되는데 장녀 안나는 후에 부친의 재위기의 역사를 담은 <알렉시아스>를 저술한다. 그들의 장남은 요하네스 2세가 되는데 1088년에 태어나 4년 후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다.

알렉시우스는 황제가 되자 즉시 어머니 안나 달라세나를 아우구스타(여황제)의 서열에 올렸다. 안나 달라세나는 1100년까지 막후 실력자로 행세하다가 골든혼 위의 자신이 몸소 세운 성 구세주 판테포프테스(전지하신 그리스도) 교회 부속 수녀원으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알렉시우스는 제국이 사방으로 막강한 적들과 대치한 상황에서 통치를 시작했다. 그 시기쯤 소아시아를 거의 장악한 셀주크는 그곳에 롬 술탄국(수도는 이코니움인데 곧 코니아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을 세워놓고 있었다. 한편 노르만 족은 이미 그리스를 침공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겠다는 로베르 기스카르의 꿈은 1085년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이렇게 노르만족의 위협에서 벗어나기가 무섭게 발칸 반도에 새로운 적이 등장했고 알렉시우스는 페체네그족과 또 다른 투르크계 민족인 쿠만족의 침략을 저지해야만 했다. 1090년 페체네그족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을 때 바다에서는 스미르나의 투르크족 수장 차카의 함대가 공격을 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비잔틴 해군은 ‘그리스의 불’로 투르크 함대를 격파하고 알렉시우스는 육지에서 페체네그군을 전멸시켰다.


알렉시우스는 1차 십자군 원정의 시작으로 다시금 위기에 직면했다. 1096년 말 서유럽의 거물급 영주들이 콘스탄티노플에 속속 도착했는데 그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부이용 출신의 고드프루아와 작고한 로베르 기스카르의 아들인 타란토 출신의 보에몽이였다. 알렉시우스는 테오도시우스 성벽 밖에서 십자군과 전투를 벌인 후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고드푸르아와 보에몽을 설득했고 그들은 원래 비잔틴 제국에 속했던 땅을 탈환하면 제국에 돌려주기로 서약했다.

알렉시우스는 재위기의 마지막 20년을 소아시아 투르크족과의 전투로 보냈다. 그는 1118년 8월 15일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요하네스가 황위를 계승했다. 요하네스는 이미 헝가리 왕 라디슬라스의 딸 프리스카 공주와 결혼한 상태였으며 프리스카는 결혼 후 이레네로 개명했다. 이레네는 요하네스에게 아들 넷, 딸 넷을 안겨주었으며 쌍둥이도 한 쌍 있었다. 그녀가 1126년에 사망하자 요하네스는 그녀와 함께 세운 구세주 판토크라토르 교회 수도원에 묻었다.

요하네스 2세는 1119년에 처음 출정하였으며 이오니아(그리스), 리디아(서부 아나톨리아), 팜필리아(소아시아 남부)에서 투르크 족을 몰아냈다. 그리고 1121년과 1122년에 페체네그족을 물리쳐 페체네그족 병사들로 황실군을 충원했다. 이 승리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페체네그의 날이라는 공휴일까지 만들어져 오래도록 기념되었다.

요하네스 2세는 1122년부터 1125년까지 베네치아를 상대로 또 싸웠고 1129년에는 헝가리의 스테파누스 2세를 물리쳤다. 또 1137년에서 1143년까지 라틴족에게서 안티오크를 재탈환하기 위한 일련의 전투를 벌였다. 그러던 중 사냥을 하다가 사고로 화살을 맞게 되었으며 1143년 4월 8일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판토크라토르 교회의 아내 곁에 묻혔다. 그는 당대에 칼로얀니스(아름다운 요하네스)라고 불렸으며 연대기 작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콤네누스 가문 출신의 요하네스 2세는 비잔틴 황제 자리에 앉았던 이들 중 가장 훌륭했다.”고 썼다.


요하네스 2세의 아들 마누엘이 1143년 11월 28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마누엘의 첫 아내 이레네는 1160년에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 이듬해에 마누엘은 안티오크 출신의 마리아와 재혼했는데 한 연대기 작가는 그녀에 대해 “당대의 가장 아름다운 공주”라고 칭했다. 8년 후 마리아는 아들 알렉시우스를 낳아 이미 자신의 질녀이며 정부인 테오도라에게서 사생아 아들을 두고 있던 마누엘에게 마침내 적출 후계자를 안겨주었다.

마누엘은 재위 첫 3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의 방비 강화에 힘써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여섯 번째 언덕 부분을 마누엘 콤네누스 성벽으로 알려진 새 성벽으로 대체했다. 또 보스포루스 입구의 아시아 쪽 해안에 있는 작은 섬을 요새화했는데 그곳은 현재 키즈 쿨레시(레안드로스의 탑)로 알려져 있다.


마누엘의 첫 전투 상대는 안티오크의 라틴족이었는데 그는 1144녀에 승리를 거두어 선황이 죽었을 때 라틴족에게 빼앗긴 킬리키아의 요새들을 되찾았다. 라틴족은 매우 약해져서 투르크족에 간단히 에데사(현재의 터키 우르파)를 빼앗기고 이로 인해 1146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가 2차 십자군을 소집하게 되었다.


십자군의 한 무리는 콘라드 왕의 지휘 아래 독일에서 출발하였고 또 한 무리는 루이 7세를 따라 프랑스에서 떠났는데 두 무리 다 성지로 가는 길에 콘스탄티노플을 경유할 예정이었다. 독일에서 출발한 십자군이 먼저 콘스탄티노플에 당도했고 비잔틴 사람들이 거세게 대항하자 그들은 해협을 거너 니코메디아로 갔다.

 

마누엘은 프랑스군과는 문제가 없었고 루이 왕을 궁전에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되이 출신의 오도는 2차 십자군 원정을 기록한 연대기에서 루이 왕과 프랑스 기사들이 구경한 궁전과 다른 명소에 대해 소개하며 “콘스탄티노플은 명성도 높지만 실제로 그보다 많은 걸 갖고 있다.”고 썼다. 그러나 궁전과 하기아 소피아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빈곤층의 열악한 삶에 대한 놀라움도 표현했다.

도시 자체는 지저분하고 악취를 풍기며 여러 곳이 영구한 어둠으로 손상되어 있다. 부자들이 건물들로 거리에 그늘을 드리웠고 더럽고 어두운 곳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여행객들의 차지다. 그런 곳들에서 살인, 강도 따위의 어둠을 좋아하는 범죄들이 저질러진다. 더욱이 이 도시는 무법천지에다 귀족들은 다 부자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다 도둑이며 범죄가 법에 의해 처벌되지도, 만천하에 드러나지도 않기에 범죄자들은 두려움도, 수치심도 모른다. 이 도시는 모든 점에서 중도를 넘어선다. 다른 도시들보다 부도 월등히 앞서지만 악도 마찬가지다.

 

역사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에 의하면 12세기의 콘스탄티노플은 폭력적인 도시로 주민들은 늘 폭동이나 반란을 일으킬 태세가 되어 있었다.

 

다른 도시의 군중들도 무질서를 즐기고 통제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시장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가장 무질서하며 무분별함을 즐기고 삐딱한 행보를 보인다. 여러 사람들에 의해 관리되고 업종도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그곳의 정신은 변화무쌍하다고 말할 수 있다. 늘 최악의 것이 승리하고 신 포도들 중에서 잘 익은 포도를 발견하기가 어려운 법이므로 시장 주민들은 무슨 일을 벌이건 선의로, 합리적으로, 적절하게 행하지를 못한다. 말 한마디에도 폭동을 일으켜 물보다 더 파괴적인 존재가 되며 …… 따라서 그들은 변덕스럽고 진실하지 못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일을 하는 법이 없고 좋은 충고를 해줘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그리하여 스스로에게 불리한 일들만을 한다. …… 또한 통치자들에 대한 무관심은 타고난 고질병이다. 그들은 자기들 손으로 행정장관을 뽑아놓고 1년도 못되어 그를 갈가리 찢어놓는다. 그들은 이성과 논리를 가지고 이런 행동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단순함과 무지함으로 이 일을 벌인다.

 

마누엘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의 제국의 영토를 되찾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기에 긴 재위기의 대부분을 전쟁과 협상으로 보냈다. 그는 서쪽으로는 노르만, 베네치아, 세르비아, 헝가리와 싸웠고 동쪽에서는 셀주크 투르크와 아르메니아를 상대했다.


비잔틴 제국이 베네치아와 갈등을 빚게 된 것은 1171년 3월 12일 마누엘 황제가 100년 가까이 골든혼 해안의 제노아인 거주 지역과 피사인 거주 지역에 인접한 한 지역을 차지하고 살아온 베네치아인 상인들을 추방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함대를 파견하여 그리스 해안과 섬들의 비잔틴 항구들을 공격하는 한편 비잔틴에 대항하기 위해 게르만, 노르만과 동맹을 맺었다. 결국 무장 휴전이 이루어졌지만 마누엘의 남은 재위 기간 동안 비잔티움과 베네치아 사이의 외교, 통상 관계가 모두 단절되었다. 또한 동방 그리스정교회와 서방 라틴교회 사이의 분열도 가속화되어 로마 카톨릭을 믿는 유럽 국가들이 비잔티움을 분리주의자로 몰아 반대편에 섰고 비잔티움은 비잔티움대로 문명화된 지 얼마 안 되는 서방인들과 그들의 신생 통치자들을 경멸했다. 마누엘 황제 재위기에 콘스탄티노플에 정착한 피사인 후고 에테리아노는 당시 라틴(이탈리아, 프랑스, 노르만, 스페인) 사람들이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거리에서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고 썼다.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가증스런 라틴인들……우리의 소유물을 탐내고 우리 비잔틴인들을 말살시키려 한다. …… 그들과 우리 사이엔 증오라는 넓은 심연이 존재하며 서로 견해도 완전히 다르고 가는 길도 반대 방향이다.”라고 했다.


이렇듯 동방과 서방이 서로 반감을 갖고 있었지만 마누엘 자신은 서방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서방의 기사들을 만나보고는 그들의 무용에 감탄했고 히포드롬에서 개최하는 마상 창시합에서 라틴인들을 물리치려고 애썼다. 궁정에서도 그리스인보다 라틴인을 우선시하여 비잔틴 사람들의 외국인 혐오를 가중시켰다.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인들은 서방 라틴인들을 멸시해서 고대 헬라스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찾았으며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헬레네스라고 칭했다.


마누엘의 서방에 대한 마지막 외교 노력은 자신의 아들 알렉시우스를 프랑스 루이 7세의 딸 아네스 공주와 결혼시킨 것이다. 프랑스를 떠날 때 겨우 여덟 살이던 어린 공주는 1180년 3월 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열두 살의 알렉시우스와 결혼하면서 안나로 개명했다.

당시 마누엘은 병에 걸려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있었으며 1180년 9월 24일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무덤 옆에는 1차 십자군 원정으로 해방된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가장 귀한 성물 중의 하나인 그리스도의 시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져 눕혀진 곳이며 성모의 눈물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알려진 반암 석판이 놓였다.

마누엘의 뒤를 이어 알렉시우스가 황위에 올랐다. 당시 그가 겨우 열두 살이었기에 그의 어머니인 안티오크 출신의 마리아가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마리아는 거의 대부분의 요직에 라틴인을 앉혔고 그로 인해 콘스탄티노플의 평민들과 그리스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땅에 떨어졌으며 ‘외국 여자’라는 빈정거림을 받았다. 결국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요하네스 2세의 조카 안드로니쿠스 콤네누스를 지지하게 되었다.


안드로니쿠스는 수려한 용모와 씩씩한 기상을 지닌 모험가로 전장에서 용맹을 떨쳐 명성을 얻었으나 모의를 꾸미다가 마누엘 황제에게 추방되었다. 마누엘 황제가 승하했을 때 안드로니쿠스는 65의 나이로 파플라고니아에 있는 저택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니케타스 코니아테스에 따르면 그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활기 차고 건강이 넘쳤다. “그의 몸 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위엄 있는 모습에 기골이 장대했으며 얼굴은 청년 같았다. 그는 방탕하지도, 식탐을 부리지도 않았고 주정뱅이도 아니었으며 호메로스의 영웅들처럼 소박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기에 눈에 띄게 건강했다.” 안드로니쿠스는 1182년 초봄에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하다가 보스포루스에 이르자 일단 멈추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군대를 들여보냈고 그 군대는 주민들과 연합하여 라틴인 대학살을 벌였다. 안드로니쿠스는 그 후에야 수도로 입성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황후 마리아는 재판에 회부되어 반역죄를 선고받았고 처음에는 수녀원에 유폐되었다가 나중에 비밀리에 익사당했다. 안드로니쿠스는 자신을 알렉시우스 2세의 섭정으로 선언한 뒤 1182년 9월 공동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알렉시우스 2세를 교살하고 황후 안나를 열세 살의 미망인으로 만들었다. 그해 말 안드로니쿠스는 나이차가 50년이나 나는 안나와 결혼하여 비잔틴 세계와 서유럽을 분개시켰다.

안드로니쿠스는 처음부터 공포정치를 실시하여 황권에 위협이 될 만한 존재는 모두 처형했다. 마침 이때 그리스를 침공한 노르만, 셀주크, 헝가리가 침략해 왔다. 노르만군은 1185년 여름 테살로니카를 점령한 뒤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군해 왔다. 라틴인의 접근에 공황 상태에 빠진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도시를 방어할 준비를 하지 못한 안드로니쿠스를 비난했다. 그러자 안드로니쿠스는 반대파를 모조리 잡아들여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중에 콤네누스 가문의 먼 친척뻘 되는 이사키우스 앙겔루스가 도망쳐 하기아 소피아로 피신하여 주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주민들은 그의 호소에 응했고 1185년 9월 12일 그는 이사키우스 2세로 즉위했다.

안드로니쿠스는 도망쳤으나 붙잡혀서 궁전의 탑에 갇혔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감옥에서 끌려나와 낙타 등에 거꾸로 태워져 시내를 한 바퀴 돈 후 히포드롬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사지를 잘리고 몸통을 난도질당했으며 그의 시신은 경기장 근처에서 며칠 동안 방치되어 부패하다가 마침내 바다에 던져졌다.

 

안드로니쿠스의 죽음으로 한 세기 넘게 비잔틴 제국을 통치한 콤네누스 왕조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안드로니쿠스의 손자들인 알렉시우스 콤네누스와 다비드 콤네누스가 트라브존(현재 터키 북동부 흑해 연안의 지방)에서 또 다른 비잔틴 왕조를 시작하면서 왕조의 혈통은 계속 이어졌으며 트라브존은 비록 단 몇 해이긴 하지만 비잔티움보다 더 오래 존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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