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선, 미시령 노을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툭 내려 않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가볍다
박두규, 그대에게
새가 날고 꽃은 피어납니다
중요한 건 그것뿐입니다
그대가
한동안 비껴 서있던 것들과 함께
절대로 정면에 있으므로
이원규, 다래술을 담그며
매실주에 취했다가
깨어보니
미점마을의 봄이었다
앵두술을 담그며
그리운 친구의 이름을
또박또박 써넣고
매암차박물관의 비파를 따다가
비파술을 담글 때도 그러하였다
친구들 까맣게 잊은 날도
선반 위의 술들은 묵묵히 익어가고
앵두와 친구의 이름
매실과 또 다른 친구의 이름
비파와 또 다른 친구의 친구의 이름
저희들끼리 어깨동무하고
에헤라, 소주와 몸을 섞는 동안
늦가을
빗점골의 다래를 따다가
술을 담는다
아무도 오지 않더라도
다래술은 익어 가리니
먼 곳의 친구를 생각하며
그 이름을 쓰고 또 지우며
장석남, 새로 생긴 저녁
보고 싶어도 참는 것
손 내밀고 싶어도
그저 손으로 손가락들을 만지작이고 있는 것
그런 게 바위도 되고
바위 밑의 꽃도 되고 난도 되고 하는 걸까
아니면 웅덩이가 되어서
지나는 구름 같은 걸 둘둘 말아
가슴에 넣어두는 걸까
빠져나갈 자리 마땅찮은 구름떼 바쁜
새로 생긴 저녁
정채봉, 첫마음
1월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 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 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던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