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대식, 겨울 나그네
너구리 한 마리가
절뚝거리며 논길을 걸어간다
멈칫 나를 보고 선다
내가 걷는 만큼 그도 걷는다
그 평행의 보폭 가운데
외로운 영혼의 고단한 투신이
고여 있다
어디론가 투신하려는 절대의 흔들림
해거름에 그는 일생일대의
큰 싸움을 시작하는 중이다
시골 개들은 이빨을 세우며 무리진다
넘어서지 말아야 할 어떤 경계가 있음을
서로 잘 알고 있다
직감이다
그가 털을 세운다
걸음 멈추고 적들을 오랫동안 응시한다
나도 안다
지구의 한켠을 걸어가는 겨울 나그네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천상병, 주막에서
골목에서 골목으로
저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디 순하기 마련인가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 가는데
할머니 등 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
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 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산 너머
쓸쓸한 성황당 꼭대기
그 꼭대기 위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아이들이 놀고 있다
아기들은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한없이 즐거운 모양이다
최두석,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무슨 꽃인들 어떠리
그 꽃이 뿜어내는 빛깔과 향내에 취해
절로 웃음짓거나
저절로 노래하게 된다면
사람들 사이에 나비가 날 때
무슨 나비인들 어떠리
그 나비 춤추며 넘놀며 꿀을 빨 때
가슴에 맺힌 응어리
저절로 풀리게 된다면
천양희,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것들
열매를 보면서 꽃을 생각하고
빛을 보면서 어둠을 생각합니다
꽃은 열매를 위해 피었다 지고
어둠은 빛을 위해 어둡습니다
별을 보면서 하늘을 생각하고
나무를 보면서 산을 생각합니다
하늘은 별을 위해 별자리를 만들고
산은 나무를 위해 숲을 만듭니다
자랑하지 않아도 스스로 아름다운 풍경은
언제나 우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백석, 멧새소리
처마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별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