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grunge4ever4you.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f-7I-Hoog44
김영현, 그후, 일테면 후일담
나는 생각한다
적당한 승리와 적당한 패배가 있었을 뿐이라고
너희 엄살떠는 무리들이나
너희 희희낙락하는 무리들에게
역사란 완전한 승자도 완전한 패자도 없을 때
오로지 시간의 완강한 방향만이
지속적인 생을 보장할 때에만
아직 희망은 사라지지 않고
거대한 강은 상처투성이의 모순을 안은 채
용서하며, 사랑하며 흐르는 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수많은 죽음 위에
그리고 그보다 더 많았을 추억들 위에
절대로 재단할 수 없는 神만의 자리가 있고
나는 절대로 어제의 나일 수가 없고
변화야말로 모든 생명 있는 것
혹은 생명 없는 것들의 본질이며
사랑에도 이끼가 기고 녹이 슬게 마련이라는 것을
이 적당한 승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 만큼
이 적당한 패배가 우리를 슬프게 하고
그리하여
이 자유와 슬픔이 또한 살아 있는 우리들의 몫이란 걸
나는 알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흐르는 강의 어쩔 수 없는 힘을 알기 때문에
손세실리아, 마흔
먹어도 먹어도 허리가 줄고 시시로
목이 맵니다 마음과 몸이 삐걱대고
번번이 서로를 거역합니다
의연한 척 무연한 척하지만 기실은
매양 갈팡질팡합니다 이따금
관계에 홀려 휘청대기도 합니다
시퍼렇게 날선 작둣날을 타는
어린 무녀의 연분홍 맨발바닥처럼
아찔하기도 하고, 차도를 건너는
민달팽이의 굼뜬 보행처럼
위태롭기도 한, 낙타도 수통도 없이
사막을 건너는, 독사의 축축한 혓바닥
도처에서 널름거리는, 이승의 무간지옥에
다름 아닌, 내딛는 곳마다 허방인, 진창인
생의 화근(花根)이며 화근(火根)이기도 한
불불혹(不不惑)인
박철, 슬프므로 슬프지 않다
슬픔을 노래할 때 희망은 메아리친다
희망은 울려퍼진다 스피커는 찢어진다
슬픔에 대해 노래하라
손에 핸드마이크를 하나씩 움켜쥐고
골목 골목 한낮의 단잠을 깨우며
떠들어라 이제 슬프므로 언젠가는 슬프지 않다
국립공원 입구에서 표를 받으며
경포대 해수욕장에서 호각을 불며 탑골공원 벤치의 뒷자리에서
중부도시의 어느 맑은 하늘 아래서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라
기도하지 마라 노래하라 슬픔에 대해
즐겨라 슬픔, 안아보자 슬픔, 뒹굴자 슬픔
날이 새도록 잇몸 부르트도록 온몸으로
맨몸으로 태워라 슬픔, 태워버려라
어깨동무를 하고 마당을 돌며 재잰잰잰
놋쇠 찢어지도록 놋물 흐르도록
두드려라 슬픔의 꽹과리
그 뒤편에 오는 희망의 메아리까지
문태준, 한 호흡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김태정, 배추 절이기
아침 일찍 다듬고 썰어서
소금을 뿌려놓은 배추가
저녁이 되도록 절여지지 않는다
소금을 덜 뿌렸나
애당초 너무 억센 배추를 골랐나
아니면 저도 무슨 삭이지 못할
시퍼런 상처라도 갖고 있는 걸까
점심 먹고 한번
빨래하며 한번
화장실 가며오며 또 한 번
골고루 뒤집어도 주고
소금도 가득 뿌려주었는데
한 주먹 왕소금에도
상처는 좀체 절여지지 않아
갈수록 빳빳이 고개 쳐드는 슬픔
꼭 내 상처를 확인하는 것 같아
소금 한 주먹 더 뿌릴까 망설이다가
그만, 조금만 더 기다리자
제 스스로 제 성깔 잠재울 때까지
제 스스로 편안해질 때까지
상처를 헤집듯
배추를 뒤집으며
나는 그 날것의 자존심을
한 입 베어물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