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remzombie.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_02vDAj1ZLM
이가림, 석류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주소서
나태주, 몸
아침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닦아주고
매만져 준다
당분간은 내가 신세지며
살아야 할 사글세방
밤이면 침대에 반듯이 눕혀
재워도 주고
낮이면 그럴 듯한 옷으로
치장해 주기도 하고
더러는 병원이나 술집에도
데리고 다닌다
처음에는 내 집인 줄 알았지
살다보니 그만 전셋집으로 바뀌더니
전세 돈이 자꾸만 오르는 거야
견디다 못해 전세 돈 빼어
이제는 사글세로 사는 신세가 되었지
모아둔 돈은 줄어들고
방세는 점점 오르고
그러나 어쩌겠나
당분간은 내가 신세져야 할
나의 집
아침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씻어주고 닦아준다
황인숙, 말의 힘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신경림, 길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 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에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을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 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윤제림, 사랑을 놓치다
내 한때 곳집 앞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
그대는 번번이 먼 길을 빙 돌아다녀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
쇠북 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또 한 생애엔
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
그대가 옆 방에 든 줄도
모르고 잤습니다
명사산 달빛 곱던
돈황여관에서의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