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아, 행복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행복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들떠오른 대낮이 짚재처럼 가라앉고
어두운 골목 질컥이는 길로
헤어졌던 사람들이 모이는 저녁
두근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면
나는 행복하다
땡삐떼 그 속을 용케 지나서
계절풍에 날아온 그림엽서 한 장
마구 그립다고 박아 쓴 글씨
옛친구의 목소리가 눈물겹게 행복하다
벚꽃이 희게 지던 봄밤
젊음과 꿈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면서
사·랑·해
그 사람이 여윈 손을 내밀었을 때
나는 소리 죽여 울고 싶었다
혹은 슬픔처럼
혹은 아픔처럼
행복은 날마다 몇 번씩 온다
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면
행복이 그다지 어려운 건 아니다
김수영,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하여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나태주, 눈부신 세상
멀리서 보면 때로 세상은
조그맣고 사랑스럽다
따뜻하기까지 하다
나는 손을 들어
세상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자다가 깨어난 아이처럼
세상은 배시시 눈을 뜨고
나를 향해 웃음 지어 보인다
세상도 눈이 부신가 보다
안효희, 아버지의 밥그릇
언 발, 이불 속으로 밀어 넣으면
봉분 같은 아버지 밥그릇이 쓰러졌다
늦은 밤 발씻는 아버지 곁에서
부쩍 말라가는 정강이를 보며
나는 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아버지가 아랫목에 앉고서야 이불은 걷히고
사각종이 약을 펴듯 담요의 귀를 폈다
계란부침 한 종지 환한 밥상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밥을 남겼고
우리들이 나눠먹은 그 쌀밥은 달았다
이제 아랫목이 없는 보일러방
홑이불 밑으로 발 밀어 넣으면
아버지, 그때 쓰러진 밥그릇으로
말없이 누워 계신다
박라연, 생밤 까주는 사람
이 사람아
산 채로 껍질을 벗겨내고
속살을 한 번 더 벗겨내고
그리고 새하얀 알몸으로 자네에게 가네
이 사람아
세상이 나를 제아무리 깊게 벗겨놓아도
결코 쪽밤은 아니라네
그곳에서 돌아온 나는
깜깜 어둠 속에서도 알밤인 나는
자네 입술에서 다시 한 번
밤꽃 시절에 흐르던 눈물이 될 것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