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도채, 우리 두 사람
무던히 오래 같이 살아왔으면서도
당신의 어디가 좋은지 몰랐는데
첫째에게 하나 둘을 가르치고
둘째 셋째
여섯 아이 말고 손주까지 길러 오면서도
할 말이 없었는데
회갑잔치를 맞을
덩실한 집 큰방에 남은 우리 두 사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여보, 가까이 가까이 좀 와요
흰머리를 뽑는다
박두규, 산문(山門)
세상 보따리 싸들고
산문을 나오는데
이적지 말 한 마디 걸어오지 않던
물소리 하나 따라나온다
문득 그대가 그립고
세월이 이처럼 흐를 것이다
뒤늦게 번져오는 산벚꽃이여
온 산을 밝히려 애쓰지 마오
끝내 못한 말 한 마디
계절의 접경(接境)을 넘어
이미 녹음처럼 짙어진 것을
김진경, 코스모스
코스모스 속엔
유랑곡마단의 천막과
나팔 소리가 있다
코스모스 속엔
까맣게 높은 천장에서
아슬아슬 줄을 타는
곡마단의 소녀가 있다
코스모스 속엔
하얀 꽃송이
팽그르르 맴을 돌며 떨어지는
물맑은 우물이 있다
검은 물빛을 보며
나도 나팔소리와 깃발 따라가는
떠돌이이고 싶었다
코스모스 속엔
하얗게 소름 마르는 길이 있다
최두석, 미소
쓸쓸한 이에게는
밝고 따스하게
울적한 이에게는
맑고 평온하게 웃는다는
서산 마애불을 보며
새삼 생각한다
속깊이 아름다운 웃음은
그냥 절로 생성되지 않는다고
생애를 걸고
암벽을 쪼아
미소를 새긴
백제 석공의
지극한 정성과 공력을 보며
되짚어 생각한다
속깊이 아름다운 웃음은
생애를 두고 가꾸어가는 것이라고
아름다운 미소가
세상을 구하리라 믿은
천사백 년 전 웃음의 신도여
그대의 신앙이
내 마음의 진창에
연꽃 한 송이 피우누나
김기홍, 오늘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포클레인 향타기 망치소리가 서서히 목청을 낮춥니다
얼굴엔 소금이 하얗게 익었습니다
비탈길 경운기 바퀴자국 같은 길이
해보다 일찍 기운 어깨에 선명합니다
타워크레인 너머 붉은 구름 토해놓고 해가 지고
옷에 묻은 한톨의 밥알에서 무한한 땀과 눈물을 보듯
잠시 고개숙여 당신을 생각합니다
아, 님이여
오늘도 하루를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