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afe.daum.net/shogun의 푸른 장미님이 쓰신 글입니다.
미카일 3세는 어머니 테오도라가 섭정으로 제국을 통치하는 동안 친구들과 어울려 술로 세월을 보내서 ‘술주정뱅이’란 별명이 붙었다. 테오도라의 섭정은 미카일이 16살이 되던 856년 3월에 막을 내렸으며 미카일은 어머니를 수녀원에 유폐시키고 외삼촌인 바르다스를 국정 책임자이자 군대 총사령관으로 임명, 단독 통치를 시작했다.
미카일 3세가 단독 황제이긴 했지만 이후 10년간 바르다스가 제국을 쥐고 흔들었으며 그는 몇 차례 아랍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불가르군과 슬라브군도 저지했다. 그리고 암흑기에 폐쇄되었던 콘스탄티노플 대학을 다시 열어 비잔틴 문예 부흥을 일으켰다. 이 문예 부흥의 대표적 인물로는 서유럽과 이슬람 세계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던 수학자 레오와 슬라브어 성서를 만든 언어학자 키릴(세례명 콘스탄티누스)가 있다. 키릴은 이 성서를 가지고 형 메토디우스, 그리고 858년 총대주교가 된 신학자 포티우스와 함께 슬라브족에 기독교를 전했다.
867년 부활절 일요일에 하기아 소피아에서 성상 숭배자들이 최후의 승리를 기념했는데 이 자리에서 앱스에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의 모습이 담긴 거대한 모자이크의 제막식이 함께 치러졌다. 이 모자이크는 아직 남아 있으며 헌납 명각도 일부 보존되어 있는데 장단격 2행연구로 “이 성상들은 사기꾼들이 한때 금했던 것을 신앙심 깊은 황제들이 다시 부활시켰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여기에서 신앙심 깊은 황제들이라 함은 미카일 3세와 바실리우스 1세를 일컫는데 바실리우스 1세는 마케도니아인으로 미카일 3세가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바실리우스는 사실 부계로는 아르메니아인의 후손이었다. 연대기 작가 시메온 마기스테르의 기록에 가난한 시골 청년이었던 바실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상경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어느 일요일 어둠이 내릴 무렵 도시 안으로 들어선 그는 묵을 곳이 없어서 황금문 근처의 성 디오메데 수도원 바깥에서 잤다. 이튿날 그는 궁전 마굿간에서 일하게 되었고 힘이 세고 용모가 준수하여 미카일 3세의 눈에 띄었다. 미카일 3세는 그를 시종장으로 임명했고 866년 5월 26일 공동 황제 자리에 앉혔다. 바실리우스는 기회를 노리며 기다리다가 867년 9월 23일 밤 미카일 3세를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했다.
그렇게 바실리우스는 단독 황제가 되었고 2세기 가까이 비잔틴 제국을 통치할 빛나는 마케도니아 왕조가 열렸다. 미카일 프셀루스는 <연대기>에 이 왕조의 마지막 두 세대의 생활상을 기록해 놓았는데 이 왕조의 시작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과연 그들처럼 신의 은총을 듬뿍 받은 왕조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우며 살인이라는 범죄 행위를 통해 잉태된 왕조임을 고려하면 기이한 노릇이다. 그럼에도 왕조의 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힘차게 가지를 뻗었으며 가지마다 그 아름다움과 찬란함에 있어 비교할 데가 없는 황제라는 과실을 맺었다.
마케도니아 왕조는 바실리우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레오 6세의 재위기에 대가 끊길 위기에 처했다. 레오 6세는 886년에 황제가 되었는데 35살이 되기 전에 세 번이나 상처(喪妻)했고 아들을 얻지 못했다. 정교회에서 네 번째 결혼은 금지되어 있었기에 레오 6세는 ‘새까만 눈’을 가진 조에 카르보노프시나를 정부로 두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1년쯤 후 조에는 딸을 낳았고 905년 9월 이윽고 그에게 아들을 안겨주었는데 그 아들은 처음엔 병약했지만 나중에 건강해졌다. 니콜라스 총대주교는 장차 콘스탄티누스 7세가 될 이 아이의 세례를 조에가 대궁전을 떠난다는 조건 아래 허락했다. 그러나 세례를 치른 사흘 후 레오 6세는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였으며 황실 예배당에서 은밀히 결혼식을 올렸다.
이 ‘네 번째 결혼’ 사건으로 비잔틴 제국은 장장 18개월 동안 혼란에 휩싸였으며 황제와 새 총대주교 에우테미우스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결국 네 번째 결혼이 교회의 승인을 받으면서 어린 콘스탄티누스는 ‘포르피로게니투스(태어나면서부터 황태자)’로 인정되었다. 912년 5월 11일 레오 6세가 세상을 하직하자 겨우 6살이었던 콘스탄티누스는 비록 4년 전에 공동 황제로 임명된 몸이었지만 부친의 황위를 물려받진 못했다. 대신 879년부터 공동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레오 6세의 동생 알렉산드로스가 황제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겨우 13개월 동안 제국을 통치했다. 그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제국의 명예를 실추시켰는데 그 첫 사건은 취중에 불가르 사신들을 맞아 그들에게 모욕을 가하고 내쳐서 불가르의 시메온 황제로 하여금 즉시 전쟁 준비에 들어가게 한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술잔치를 일삼고 성찬식을 모방한 이교 행렬을 벌이는 등 불명예스러운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술에 취해 벌이던 폴로 경기에서 말에서 떨어졌고 이틀 후인 913년 6월 4일 삶을 마감했다.
조에의 아들이 콘스탄티누스 7세로 황위에 올랐다. 처음엔 조에가 섭정 노릇을 했으나 919년 3월 25일 로마누스 레카페누스 장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고 황제의 후견인이 되었다. 로마누스는 자신의 딸 헬레네와 황제를 약혼시켰고 황제가 14살 생일을 맞기 3주 전인 919년 5월 4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두 사람을 결혼시켰다. 콘스탄티누스 7세는 920년 9월 24일 장인에게 카이사르의 칭호를 내렸고 같은 해 12월 17일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로마누스는 마케도니아 왕조 대신 자신의 왕조를 세울 목적으로 세 아들 크리스토페르, 스테파누스, 콘스탄티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그러나 운명은 그의 편이 아니었으니 우선 크리스토페르가 932년에 요절했다. 그리고 944년 12월 17일, 두 아들 스테파누스와 콘스탄티누스가 반란을 일으켜 그를 폐위시켰다. 그는 수도원으로 추방되었고 스테파누스와 콘스탄티누스는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945년 9월 27일 다시 반란이 일어나 그들도 궁에서 쫓겨나 아버지가 있는 수도원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스테파누스와 콘스탄티누스는 결국 더 멀리 에게 해의 섬으로 추방되었고 로마누스는 948년 6월 15일에 생을 마감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7세는 945년에 단독 황제가 되어 959년 11월 19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국을 통치했다. 그의 군대는 아랍군을 상대로 몇 차례 주목할 만한 승리를 거두는데 그의 군대를 이끈 두 명장 니케포루스 포카스와 요하네스 치미스케스는 후에 차례로 비잔틴 황제가 된다.
콘스탄티누스 7세는 아들 로마누스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 로마누스는 황제가 되기 3년 전에 여인숙 주인의 딸이며 미모의 매춘부인 테오파노와 결혼하여 콘스탄티노플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으며 테오파노에게서 두 아들 바실리우스와 콘스탄티누스를 얻었다. 바실리우스와 콘스탄티누스는 어린 나이에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다.
로마누스 2세는 재위 초기에 니케포루스 포카스를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니케포루스는 크레타의 사라센군과 싸우기 위해 원정을 떠났으며 961년 3월 7일 사라센군의 거점 칸디아(크레타 섬의 헤라클리온)를 점령, 134년간 지속되어온 크레타 섬에서의 아랍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이듬해 초 그는 킬리키아 평원을 전광석화처럼 가로지르며 22일 만에 55개의 도시를 함락시켰다. 그는 이듬해 봄에 공격을 재개하려고 했으나 963년 3월 15일 로마누스 2세가 낙마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계획을 취소했다.
로마누스 2세가 세상을 하직한 건 그의 아내 테오파노가 딸 안나를 낳고 이틀 만이었다. 테오파노와 그녀의 어린 세 아이들은 졸지에 의지할 곳 없는 딱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테오파노는 니케포루스 포카스에게 비밀리에 도움을 청하는 전갈을 보냈고 니케포루스 포카스는 그녀의 보호자가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그의 군대가 그를 황제로 추대했고 963년 8월 16일 콘스탄티노플에 개선한 그는 하기아 소피아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두 공동 황제 바실리우스와 콘스탄티누스를 양쪽에 거느리고 폴리에욱투스 총대주교에 의해 니케포루스 2세로 탄생했다. 그리고 9월 20일 테오파노와 결혼했다.
니케포루스는 965년 사라센군과 싸우기 위해 다시 출정했으며 타르수스를 점령, 그곳을 키프로스 재정복의 기지로 삼았다. 그는 969년에 332년간 아랍군의 수중에 넘어가 있던 안티오크를 재탈환하였으며 그곳에서 ‘사라센군 잡는 귀신'으로 환영받았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의 테오파노는 니케포루스의 친척인 요하네스 치미스케스와 정을 통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부정한 두 남녀는 니케포루스를 없앨 계략을 짰고 969년 12월 10일 밤 요하네스는 부하들을 이끌고 궁전에서 자고 있는 니케포루스를 암살했다. 이제 콘스탄티노플은 요하네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테오파노는 요하네스가 자신과 결혼하리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폴리에욱투스 총대주교가 요하네스의 대관식을 집행하는 조건으로 먼저 그녀를 추방할 것을 요구했다. 요하네스는 순순히 테오파노를 섬의 수녀원으로 쫓아냈고 969년 크리스마스에 폴리에욱투스는 그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다. 요하네스는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테오파노에 의해 수녀원에 갇혀 지내던 로마누스 2세의 누이 테오도라 공주와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971년 11월 하기아 소피아에서 새 총대주교 바실리우스의 집도 아래 정식으로 거행되었다.
요하네스는 재위기의 마지막 5년을 일련의 눈부신 승리들로 장식했는데 972년 키예프 공국의 스비야토슬라프 대공을 물리친 것이 그 시작이었다. 975년 그는 동방 원정을 떠나 팔레스타인, 시리아, 레바논을 정복했으며 헤라클리우스 이래 그 지역에 발을 들인 첫 비잔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에 중병에 걸려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으며 976년 1월 11일에 세상을 하직했다.
황위는 로마누스 2세의 장남 바실리우스에게 넘어갔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17살이었다. 14살이 된 그의 동생 콘스탄티누스도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다. 바실리우스 2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비잔틴 황제 중 하나로 찬란히 빛났던 긴 재위기 내내 국사에만 전념했다.
바실리우스 2세의 재위기에 두 번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둘 다 작고한 요하네스 1세 치미스케스의 측근이었던 바르다스 스클레루스가 주도한 것으로 각각 979년과 986년에 일어났고 모두 진압되었다. 두 번째 반란 때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대공의 도움을 받은 바실리우스 2세는 블라디미르와 누이 안나를 결혼시켰으며 이것으로 비잔틴과 러시아 황실의 첫 결합이 이루어졌다. 블라디미르는 989년 초 8,000명의 바랑기아인(러시아화된 스칸디나비아 바이킹) 병력을 실은 함대를 보냈고 이 병력은 후에 황제의 근위대가 되었다. 바랑기아인 근위대는 비잔틴 제국 후기까지 이어지다가 잉글랜드 출신의 용병들로 대체되었다.
986년 바실리우스 2세는 그리스를 침공한 사무엘 황제가 이끄는 불가르군을 치기 위해 출정했다. 사무엘은 매복 기습으로 비잔틴 군대를 거의 전멸시켰고 바실리우스는 복수를 다짐하며 도망쳤다. 그리고 다음 25년간을 불가르군과의 전쟁에 바쳤다. 이 긴 싸움의 전환점은 1014년에 도래했으니 비잔틴 군대가 대승을 거두어 비록 사무엘 황제는 놓쳤지만 1만 5,000명 가량의 불가르군을 생포했다. 바실리우스는 이 포로들을 백 명에 한 명씩만 남기고 모두 장님으로 만들었으며 그 한 명씩은 한쪽 눈을 남겨 전우들을 이끌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눈을 잃은 불가르군 포로들은 긴 행렬을 이루어 고국으로 향했으며 마침내 그들이 사무엘의 막사에 도착하자 그 충격적인 광경을 본 사무엘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가르군은 4년을 더 싸운 뒤에야 굴복했다. 이후 바실리우스 2세는 ‘불가록토누스(불가르인의 학살자)’로 불리게 되었다.
바실리우스 2세는 1021년 북서 아시아로 진군하여 그해 그루지아와 아르메니아를 합병하고 제국의 국경을 아락세스 강(오늘날의 볼가 강)까지 넓혔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원정으로 그는 잠시 병을 앓은 뒤 1025년 12월 15일에 숨을 거뒀다.
콘스탄티누스 8세가 형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는데 65살의 나이였다. 그는 반세기 동안 공동 황제의 자리에 있었지만 제국의 통치에 있어서는 사실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고 쾌락에만 빠져 산 인물이었다. 미카일 프셀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연극, 경마, 검투 시합, 사냥, 야생동물 싸움, 노름 따위를 즐기느라 중요한 정무도 챙기지 않았으며 말년에 후계자를 뽑는 일까지도 게을리하였다.
그는 장녀 에우도키아는 이미 수녀가 되었으므로 건너뛰고 둘째 딸 조에로 하여금 황통을 잇게 했다. 프셀루스는 조에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내가 둘째딸을 본 건 그녀가 몹시 늙었을 때였는데 위풍당당하고 미모가 빼어나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을 맞게 된 콘스탄티누스 8세는 마침내 그녀의 배우자로 먼 친척인 61살의 로마누스 아르기루스를 선택했다. 로마누스는 한 여자와 40년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해오고 있었지만 콘스탄티누스 8세는 조에와 결혼하지 않으면 눈알을 뽑아버리겠다고 그를 협박하고 그의 아내를 수녀원으로 보냈다. 그리하여 로마누스는 50살의 조에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고 콘스탄티누스 8세는 그 사흘 후인 1028년 11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사도 교회에 안장되었는데 그곳에 묻힌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새 황제 로마누스 3세가 등극했다. 그는 전성기를 넘긴 나이임에도 여전히 용모가 출중했지만 경박했고 위대한 전임자 바실리우스 2세에 비하면 황제의 자질이 부족했다. 그는 바실리우스 2세처럼 용사 황제로 이름을 날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1030년 아랍군과 싸우기위해 출정했다. 그러나 그 싸움은 참패로 끝났다. 비잔틴 군대는 사라센군에 매복 공격을 당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급히 후퇴하여야 했던 것이다.
로마누스 3세는 곧 조에에게 싫증이 나서 정부를 두었다. 분노한 조에도 젊은 애인을 만들었는데 그가 바로 파플라고니아(아나톨리아 북쪽 흑해 연안 지역)인 미카일이다. 사실 조에에게 미카일을 소개한 사람은 환관 노릇을 하던 그의 동생 오르파노트로푸스(‘고아들의 수호자’) 요하네스였다. 로마누스 3세는 곧 병에 걸렸고 1034년 4월 11일 밤 궁전 목욕탕에서 병을 치료하기 위한 수영을 하다가 익사했다. 프셀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조에와 미카일이 황제를 죽인 것으로 모두가 확신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튿날 아침 로마누스 3세의 시신이 목욕탕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상태에서 조에와 미카일은 알렉시스 총대주교의 집도 아래 대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총대주교는 조에의 새 남편을 미카일 4세로 임명하고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고 같은 날 로마누스 3세는 매장되었다.
미카일은 건강이 좋지 못했으며 프셀루스가 기록한 증상들을 보건데 간질과 부종을 앓았던 듯하다. 최고 관직에 있던 그의 동생 오르파노트로푸스 요하네스는 자신의 가문 사람을 황위에 앉히기 위해 조카 미카일을 조에에게 소개시켰다. 이 청년은 미카일 칼라파테스로 알려져 있는데 칼라파테스는 땜장이란 뜻으로 그의 부친의 원래 직업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조에는 그를 공식적으로 자신의 양자로 삼았고 미카일 4세는 그를 카이사르 서열에 올렸다.
미카일 4세는 1041년 12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이 끝난 직후 오르파노트로푸스 요하네스는 조에에게 미카일 칼라파테스를 후계자로 임명할 것을 청했다. 조에는 기꺼이 그 청을 수락했고 1041년 12월 13일 그녀의 양자는 미카일 5세가 되었다.
새 황제는 처음에는 조에에게 복종적이었으며 공개석상에서 함께 모습을 나타낼 때마다 그녀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다가 그는 숙부 콘스탄티누스와 결탁하게 되었고 콘스탄티누스를 내무대신으로 임명했다. 형제인 요하네스를 늘 질투하던 콘스탄티누스는 황제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요하네스를 추방시키도록 만들었다. 미카일 5세는 단독 황제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조에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042년 4월 18일 조에는 강제로 수녀원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분개하여 대궁전으로 쳐들어가 사랑하는 국모를 복귀시킬 것을 요구했다. 시위는 이튿날까지 계속되었고 3,000명의 시위대가 황제의 군대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나 분기탱천한 시민들은 방어군을 물리치고 대궁전을 점령했다. 미카일 5세와 콘스탄티누스는 교회로 피신했다. 그러나 성난 군중은 그들을 광장으로 끌어내어 눈알을 뽑은 뒤 추방했으며 그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1042년 4월 21일, 조에는 15년 전 콘스탄티누스 8세에 의해 강제로 수녀원에 보내졌던 여동생 테오도라와 함께 황위에 올랐다. 당시 조에는 64살, 테오도라는 그보다 한두 살 아래였지만 프셀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의 용모와 행동은 전혀 나이와 어울리지 않았다.
언니는 원래 살집이 있는 편이었고 키는 아주 크진 않았다. 당당한 눈썹과 큰 눈이 인상적이었고 미간이 넓었다. 코는 살짝 매부리코였다. 머리카락은 금발이었고 피부가 눈이 부시도록 희었다. 나이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세히 보면 팔과 다리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었으며 그녀에 대해 모르는 이는 여기 젊은 여인이 하나 있노라고 말하기가 쉬웠다. 그녀의 피부는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고 매끄러웠기 때문이다. 한편 테오도라는 언니보다 키가 크고 날씬했다. 그녀는 두상이 몸과 균형이 맞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녀는 조에보다 달변인 데다 …… 행동도 더 빨랐다. 그녀의 눈빛에는 매서움이 없었으며 쾌활하고 미소 짓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기회만 생기면 말을 하려고 했다.
조에와 테오도라의 공동 통치는 석 달을 지속하지 못했다. 그 기간에 박력있는 남자가 제국을 통치해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테오도라는 결혼할 의사가 전혀 없었고 조에는 다시 결혼하고 싶어해서 그녀의 배우자감 물색이 시작되었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모노마쿠스가 낙점되었는데 그는 7년 전에 추방된 부유한 귀족이었다. 콘스탄티누스와 조에 모두 이미 두 번이나 결혼한 몸이라 알렉시스 총대주교가 그들의 결혼을 승인하지 않아서 그들은 궁전 예배당에서 식을 올렸다. 마음이 누그러진 알렉시스는 이튿날인 1042년 6월 1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콘스탄티누스 9세의 대관식을 감행했다.
프셀루스의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9세는 용모가 출중했지만 통치자로서는 너무도 무능했다. 프셀루스의 <연대기> 제6권에 보면 그는 인심이 후해서 자신이 총애하는 사람이면 사회 계급에 관계없이 고위직에 앉히고 특권을 주었다.
황제로 등극한 콘스탄티누스 9세는 박력도 신중함도 보이지 못했다. …… 천한 시정잡배들에게 원로원 문을 활짝 열어놓았으며 황제가 되자마자 한꺼번에 떼거리 인사를 단행, 소수도 아닌 한 무리를 국가 최고 고위직에 발탁했다. 이로 인해 많은 의식들이 치러졌고 도시 전체가 인심 후한 군주를 맞게 되었다는 생각으로 기쁨에 들떴다.
일부 노동자 계층 사람들은 새 황제의 무절제한 인심을 이용하여 성직자가 되었다. 이에 대해 연대기 작가 크리스토페르는 “문지기, 포도밭 일꾼, 가축 상인, 채소 장수, 빵 굽는 사람, 대장장이, 원예사, 구두장이, 행상 할 것 없이 모두 성직자가 되고 싶어 한다.”고 썼다. 그는 이들이 무지하기 짝이 없어서 대부분이 까막눈인 데다 예배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고 과거에 쓰던 직업 용어들을 쓴다고 푸념했다.
콘스탄티누스 9세는 조에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미모의 매춘부 스클레리나를 정부로 두고 있었다. 그는 황제가 되자마자 스클레리나를 조에에게 소개하고 궁전에 살게 했다. 그는 공식석상에 조에와 스클레리나를 함께 동반하는 등 드러내 놓고 스클레리나와의 관계를 유지했으며 조에도 남편이 정부와 함께 사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 듯 했다. 프셀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조에는 자신의 처소에서 향수와 고약을 만들며 소일했으며 그녀의 처소는 연금술사의 실험실을 방불케 했고 화롯불이 활활 타오르는 지옥 같은 그곳에서 하인들은 죽을 고생을 하며 일했다. 프셀루스의 글에 의하면 “조에는 열기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사실 그녀와 테오도라는 천성적으로 별났다. 그들은 신선한 공기와 좋은 집, 초원, 정원을 경멸했다. 그것들이 지닌 매력은 그들에겐 아무 의미도 없었다. 반면 자신의 처소에 틀어박히면 …… 그들은 진실로 만족했다.”
콘스탄티누스 9세와 스클레리나의 부정한 관계는 콘스탄티노플 전체에 알려졌고 주민들은 황제의 행동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로 인해 1044년 3월 9일에 폭동까지 일어났으며 폭도들은 조에와 테오도라가 나서서 간곡히 만류한 뒤에야 철수했다. 콘스탄티누스 9세는 폭동 가담자들을 엄격히 처벌했는데 한 연대기 작가의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 무슬림, 아르메니아인들’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쫓겨났다. 그런 일이 있은 직후 스클레리나는 세상을 떠났고 슲픔에 잠긴 황제는 그녀를 교회에 매장했다.
조에는 1050년에 죽었으며 정확한 사망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프셀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 9세는 조에의 죽음에 ‘크게 상심했지만’ 인질로 잡혀 와 있던 알라니족(흑해 연안 북동쪽의 스텝 지역에서 기원한 이란계 유목민족)의 젊은 공주를 새 정부로 삼아 그녀에게서 위안을 얻었다. 그는 여생을 알라니족 공주와 궁전의 어릿광대와 함께 보냈는데 난쟁이 어릿광대는 밤에 황제와 한 침대에서 잤다.
콘스탄티누스 재위기의 마지막 해에 교황 레오 9세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일 케롤라리우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겼다. 이들의 갈등은 1054년 7월 16일 토요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오후 예배가 진행되던 중 세 명의 교황 사절 중 하나인 훔베르트 추기경이 중앙 통로를 뚜벅뚜벅 걸어와 제단에 켈룰라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을 파녀한다는 내용이 담긴 교황의 칙서를 올려놓으면서 절정에 달했다. 켈룰라리우스는 즉시 종교회의를 열어 세 교황 사절을 제명하였으며 이는 그리스정교회와 로마카톨릭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고 이 분열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때쯤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쿠스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이듬해까지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가다 1055년 1월 11일에 고인이 되었고 사랑하는 스클레리나 곁에 묻혔다.
콘스탄티누스 9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기에 프셀루스의 표현에 따르면 “테오도라에게 대권이 넘어갔다.” 테오도라는 이미 75살의 나이였고 그녀의 재위는 18개월밖에 못 갔다. 그녀는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고 몸소 국정을 돌보았다. 주위에선 남자 후계자를 지명해야 한다는 만장일치의 합의가 있었지만 그녀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그것을 거부했다. 그러다 1056년 8월 말경 그녀는 갑자기 극심한 복통을 일으켰으며 죽음을 눈앞에 둔 것처럼 보였다. 황제의 고문회의에서 후계자로 미카일 브링가스라는 나이 든 문관을 추천했고 테오도라는 그를 후계자로 받아들였다. 바로 그날인 1056년 8월 31일 그녀는 세상을 떴고 브링가스가 미카일 6세로 황위를 계승했다.
테오도라는 그녀의 5대조 할아버지 바실리우스 1세를 필두로 189녀간 비잔틴 제국을 다스려온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다.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에 비잔티움은 비교를 불허하는 최강의 제국의 위상을 되찾았으며 페르시아에서 아드리아 해까지, 도나우 강에서 에게 해 제도까지 국경을 넓혔다. 또한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중세의 암흑에서 벗어나 미개상태 직전까지 추락한 세계에서 고전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을 일구어낸 위대한 왕조는 테오도라 포르피로게니타(‘태어나면서부터 황녀’란 뜻)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