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 중 하나는 농업적으로 충분히 자족이 가능한 나라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들이 충분한 식량 자급을 달성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땅이 식량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유한 나라로 수출하기 위한 환금 작물들을 재배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국제적 경제 질서에서,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커피, 설탕, 파인애플, 담배, 바나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빵과 쌀보다 훨씬 더 우선권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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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4세기 카이사리아의 주교 바실리우스는 이 점에 관하여 자신의 좌절을 표현하면서, 부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하면 당신에게 가난한 자들의 비참함을 깨닫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당신의 부요가 가난한 자들의 울음에서 나온 것임을 당신에게 이해시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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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세 제기되어야 할 질문은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줘야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언제쯤 가난한 자들로부터의 빼앗기를 멈출 것인가?”이다. 가난한 자들이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문제다.
모든 사람이 우리의 생활 기준으로 살만큼 충분한 자원이 있다거나, 우리는 열심히 일한 데다 신의 은총을 받아서 부유하다거나, 가난은 가난한 자들의 실패 때문이라는 생각은 모두 가난한 자로부터 강탈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체제가 고안해 낸 무자비한 신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