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natureandbeauty.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KzyR9qpAdd4
김기택, 말랑말랑한 말들을
돌 지난 딸아이가
요즘 열심히 말놀이 중이다
나는 귀에 달린 많은 손가락으로
그 연한 말을 만져 본다
모음이 풍부한
자음이 조금만 섞여도 기우뚱거리는
말랑말랑한 말들을
어린 발음으로
딸아이는 자꾸 무어라 묻는다
발음이 너무 설익어 잘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억양의 음악이 어찌나 탄력이 있고 흥겨운지
듣고 또 들으며
말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음 직한 비밀스러운 문법을
새로이 익힌다
딸아이와 나의 대화는 막힘이 없다
말들은 아무런 뜻이 없어도
저 혼자 즐거워 웃고 춤추고 노래하고 뛰어논다
우리는 강아지나 새처럼
하루 종일 짓고 지저귀기만 한다
짖음과 지저귐만으로도
너무 할 말이 많아 해 지는 줄 모르면서
김춘수, 제2번 비가(悲歌)
아내라는 말에는
소금기가 있다
보들레르의 시에서처럼
나트리움과 젓갈 냄새가 난다
쥐오줌풀에 밤이슬이 맺히듯
이 세상 어디서나
꽃은 피고 꽃은 진다
그리고 간혹 쇠파이프 하나가 소리를 낸다
길을 가면 내 등 뒤에서
난데없이 소리를 낸다
간혹 그 소리 겨울밤 내 귀에 하염없다
그리고 또 그 다음
마른 나무에 새 한 마리 앉았다 간다
너무 서운하다
고진하, 직박구리
어떤 시인이
꽃과 나무들을 가꾸며 노니는 농원엘 갔었어요
때마침
천지를 환하게 물들이는 살구나무 꽃가지에
덩치 큰 직박구리 한 마리가 앉아
꽃 속의 꿀을 쪽쪽 빨아먹고 있었지요
곁에 있던 누군가 그걸 바라보다가
꽃가지를 짓누르며 꿀을 빨아먹는 새가 잔인해 보인다며
훠어이 훠어이 쫓아버렸어요
아니, 그렇다면
꿀이 흐르는 꽃가지에 앉은 생(生)이
꿀을 빨아먹지 않고 무얼 먹으란 말입니까
이문재, 푸른 곰팡이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박남준, 취나물국
늦은 취나물 한 움큼 뜯어다 된장국 끓였다
아흐 소태, 내뱉으려다
이런, 너 세상의 쓴 맛 아직 당당
멀었구나
입에 넣고 다시금 새겨
빈 배에 넣으니 어금니 깊이 배어나는 아련한 곰취의 향기
아, 나 살아오며 두번 열번 들여다보지 못하고 얼마나 잘못 저질렀을까
두렵다 삶이 다하는 날, 그때는 또
무엇으로 아프게 날 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