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룡, 소화(消化)
차내 입구가 몹시 혼잡하오니
다음 손님을 위해서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승객 여러분
봄 여름 가을
입구에서 서성대고 계시는
승객 여러분
입구가 몹시 혼잡하오니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갈 봄 여름 없이
가을이 옵니다
다음 손님을 위해서 조금씩
겨울로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정류장은 봄입니다
한영옥, 벌써 사랑이
벌써 사랑이 썩으며 걸아가네
벌써 걸음이 병들어 절룩거리네
그나마 더는 못 걷고 앙상한 수양버들 아래
수양버들 이파리 수북한 자리에 털썩 눕네
누운 키 커 보이더니 점점 줄어드네
병든 사랑은 아무도 돌볼 수가 없다네
돌볼수록 썩어 가기 때문이네
누구도 손대지 못하고 쳐다만 볼 뿐이네
졸아든 사랑, 거미줄 몇 가닥으로 남아 파들거리네
사랑이 몇 가닥 물질의, 물질적 팽창이었음을 보는
아아 늦은 저녁이여
머리를 탁탁 쳐서 남은 물질의
물질적 장난감을 쏟아 버리네
더 캄캄한 골목 가며 또 머리를 치네
마지막으로 물큰하게 쏟아지는
찬란한 가운데 토막, 사랑의 기억
더는 발길 받지 않는 막다른 골목까지 왔네
이원, 고요
시간을 깎는 칼이 있다
시간의 아삭거리는 속살에 닿는 칼이 있다
시간의 초침과 부딪칠 때마다 반짝이는 칼이 있다
시간의 녹슨 껍질을 결대로 깎는 칼이 있다
시간이 제 속에 놓여 있어 물기 어린 칼이 있다
가끔 중력을 따라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칼이 있다
그때마다 그물처럼 퍼덕거리는 시간이 있다
마종기, 담쟁이꽃
내가 그대를 죄 속에서 만나고
죄 속으로 이제 돌아가니
아무리 말이 없어도 꽃은
깊은 고통속에서 피어난다
죄없는 땅이 어느 천지에 있던가
죽은 목숨이 몸서리치며 털어버린
핏줄의 모든 값이 산불이 되어
내 몸이 어지럽고 따뜻하구나
따뜻하구나, 보지도 못하는 그대의 눈
누가 언제 나는 살고 싶다며
새 가지에 새순을 펼쳐내던가
무진한 꽃 만들어 장식하던가
또 몸풀듯 꽃잎 다 날리고
헐벗은 몸으로 작은 열매를 키우던가
누구에겐가 밀려가며 사는 것도
눈물겨운 우리의 내력이다
나와 그대의 숨어있는 뒷일도
꽃잎 타고 가는 저 생애의 내력이다
김준태, 감꽃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 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