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 세상의 등뼈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박라연, 침향(沈香)
잠시 잊은 것이다
생(生)에 대한 감동을 너무 헐값에 산 죄
너무 헐값에 팔아버린 죄
황홀한 순간은 언제나 마약이라는 거
잠시 잊은 것이다
저 깊고 깊은 바다 속에도 가을이 있어
가을 조기의 달디단 맛이 유별나듯
오래 견딘다는 것은 얼마나 달디단 맛인가
불면의 향(香)인가
잠시 잊을 뻔했다
백단향(白檀香)이
지상의 모든 이별이 그러하다는 것을
깊고 깊은 곳에 숨어 사는
침향(沈香)을
양애경, 장미의 날
장미의 기분을 알 것 같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가지 위에
솜털 같은 가시들을 세우고
기껏 장갑 위 손목을 긁거나
양말에 보푸라기를 일으키거나 하면서
난 내 자신쯤은 충분히 보호할 수 있어요
라고 도도하게 말하는
장미의 기분
오늘 나는 하루 종일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가위에 잘려 무더기로 쓰러지는 장미꽃들과 함께
축축한 바닥에 넘어졌다
강인한, 돌과 시
햇빛이 부서져서 그물눈으로
일렁거리는 물 속
고운 빛깔로 눈 깜박이는 돌빛
건져올리면
마르면서 마르면서
버짐꽃이 피고
내가 쓰는 글도
물 속 깊은 생각
치렁한 사념의 물빛에서 건져올리면
햇빛에 닿아 푸석푸석
마른 돌꽃이 피고
황동규, 쨍한 사랑 노래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줄 처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