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hiromiiiii.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JA_MiSx3rg8
성미정, 사랑은 야채 같은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씨앗을 품고 공들여 보살피면
언젠가 싹이 돋는 사랑은 야채 같은 것
그래서 그녀는 그도 야채를 먹길 원했다
식탁 가득 야채를 차렸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오이만 먹었다
그래 사랑은 야채 중에서도 오이 같은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야채뿐인 식탁에 불만을 가졌다
그녀는 할 수 없이 고기를 올렸다
그래 사랑은 오이 같기도 하고 고기 같기도 한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식탁엔 점점 많은 종류의 음식이 올라왔고
그는 그 모든 걸 맛있게 먹었다
결국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사랑은 그가 먹는 모든 것
정일근, 어머니의 그륵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김명인, 봄밤
'봄밤'이라고 적자 씌어진 글자 밑으로
희미한 물줄기가 번져 올라왔다
찬 샘이 있었다
낡은 철조망을 걷어내고
몇 개의 나무벤치를 내다 놓는다
늙은 아카시아가
머리 위로 눈비처럼 꽃가루 흩뿌린다
그곳은 한때 맑은 저수지 자리였다
회색의 우중충한 건물 지하로 들어가자 입구가 닫히고
매립지 밑에서 꽉 찬 노래가 새어나온다
유수지의 꽃잎은 봄밤의 수문을 틀어막고
애인들은 밤새 말을 잊을 것이다
제 일몰 다 펴기에도
봄밤의 경계는 너무 짧다
캄캄한 뻘흙 속에서 그대가 잠시 쉬다 간다
장석남, 내 살던 옛집 지붕의 갸륵함에 대해서
나는 그 집 지붕의 갸륵함에 대해서
노래할 수 있을까
불임으로 엉킨 햇빛의 무게를
견디는, 때로는 고요 속에 눈과 코를 만들어
아래로 내려보내서는 서러운 허공중들도
감싸안는
그 집 지붕의 갸륵함에 대해서
클레멘타인을 부르던 시간들을 아코디언처럼
고스란히 들이마셨다가
계절이 지칠 때
꽃 피는 육신으로 다시 허밍하는
그 집 지붕의 단란한 처마들
나는 걸음에 젖어서
그 갸륵함에 대해서
조창환, 당나귀
염소 대신
당나귀는 어떨까
황토 먼지 자욱한
저녁 길
뿌옇게 흐린 잔등에
한 무더기 봇짐 얹고
투벅투벅
걷는
당나귀
땀 젖고 지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