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agnesmelanie.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2RfmYYb1XOA
이진명, 무늬들은 빈집에서
언덕에서 한 빈집을 내려다보았다
빈집에는
무언가 엷디엷은 것이 사는 듯했다
무늬들이다
사람들이 제 것인 줄 모르고 버리고 간
심심한 날들의 벗은 마음
아무 쓸모없는 줄 알고 떼어놓고 간
심심한 날들의 수없이 그린 생각
무늬들은 제 스스로 엷디엷은 몸뚱이를 얻어
빈집의 문을 열고 닫는다
너무 엷디엷은 제 몸뚱이를 겹쳐
빈집을 꾸민다
때로 서로 부딪치며
빈집을 이겨낸다
언덕 아래 빈집
늦은 햇살이 단정히 모여든 그 집에는
무늬들이 매만지는 세상 이미 오랬다
최영철, 21세기 임명장
100년 동안 너의 복무를 허락한다
부디 잊지 말기 바란다
너에게 사령을 내리는
저 근엄한 어깨가 떨고 있지
흠흠 헛기침을 해대며
넥타이 졸라매는 그 손길 파리하지
우렁우렁 뭐라 달변을 늘어놓는
햇살들의 잔기침
너무 치닫지 말기 바란다
너무 자신만만하지 말기 바란다
더 이상 길을 내고
다리를 올리지 말기 바란다
길의 끝 다리 뻗은 자리
수렁에 닿지 말기 바란다
이미 쌓은 모래성
아슬한 낭떠러지가 되었구나
너무 높이 남긴 탑
허물고 가야겠구나
너무 분명하게 써놓은 약속
지우고 가야겠구나
너무 가득 차오른 불길한 아침
등지고 가야겠구나
100년 후
여기에 기록할 아무 공적이 없기를
잠시 떠맡은 해 별 풀 달
그냥 그 자리 둥실 떠 있기를
김경미, 식사법
콩나물처럼 끝가지 익힌 마음일 것
쌀알빛 고요 한 톨도 흘리지 말 것
인내 속 아무 설탕의 경지 없어도 묵묵히 다 먹을 것
고통, 식빵처럼 가장자리 떼어버리지 말 것
성실의 딱 한 가지 반찬만일 것
새삼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제 명에나 못 죽는 건 아닌지
두려움과 후회의 돌들이 우두둑 깨물리곤 해도
그깟것 마저 다 낭비해버리고픈 멸치똥 같은 날들이어도
야채처럼 유순한 눈빛을 보다 많이 섭취할 것
생의 규칙적인 좌절에도 생선처럼 미끈하게
빠져나와
한 벌의 수저처럼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할 것
한 모금 식후 물처럼 또 한 번의 삶을
잘 넘길 것
정호승, 내 그림자에게
이제 우리 헤어질 때가 되었다
어둠과 어둠 속으로만 떠돌던 나를
그래도 절뚝거리며 따라와주어서 고맙다
나 대신 차에 치여 다리를 다친 일과
나 대신 군홧발에 짓이겨진 일은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다
가정법원의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
너 혼자 울면서 재판 받게 한 일 또한 미안하지만
이제 등에 진 짐은 다 버리고
신발도 지갑마저도 다 던져버리고
가볍게 길을 떠나라
그동안 너는 밥값도 내지 않고 내 밥을 먹었으나
이제 와서 내가 밥값은 받아서 무엇하겠니
굳이 눈물 흘릴 필요는 없다
뒤돌아서서 손 흔들지 말고
가라
인간이 사는 곳보다
새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어린 나뭇가지에서 어린 나뭇가지로 날아다니는
한마리 새의 그림자가 돼라
이동백, 비
이윽고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지상의 아랫도리가
버티다 못해 젖어들고
구름이
승천의 길목에서
목을 꺾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