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고통의 춤
바람이 독점한 세상
저 드센 바람 함대
등 푸른 식인 상어떼
반사적으로 부풀어오르는 내 방광
오늘 밤의 싸움은 팽팽하다
나는 그것을 예감한다
그리하여 이제 휘황한
고통의 춤은 시작되고
슬픔이여 보라
네 리듬에 맞추어
내가 춤을 추느니
이 유연한 팔과 다리
평생토록 내 몸이
얼마나 잘
네 리듬에 길들여졌느냐
채호기, 물과 수련
새벽에 물가에 가는 것은 물의 입술에 키스하기 위해서이다
안개는 나체를 가볍게 덮고 있는 물의 이불이며
입술을 가까이 했을 때 뺨에 코에
예민한 솜털에 닿는 물의 입김은
기화(氣化)하는 흰 수련의 향기이다
물은 밤에 우울한 수심(水深)이었다가 새벽의 첫 빛이
닿는 순간 육체가 된다. 쓸쓸함의 육체
쓸쓸함의 육체에 닿는 희미하게 망설이며
떨며 반짝이는 빛
안개가 걷히고 소리도 없이 어느 새
물기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저 수련은
밤새 물방울로 빚은 물의 꽃
물의 말을 듣기 위해 귀를 적신다
물이 밤새 휘갈긴 수련을 읽는다
이성복, 남해 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민영, 봉숭아꽃
내 나이
오십이 되기까지 어머니는
내 새끼 손가락에
봉숭아를 들여주셨다
꽃보다 붉은 그 노을이
아들 몸에 지필지도 모르는
사악한 것을 물리쳐준다고
봉숭아물을 들여 주셨다
봉숭아야 봉숭아야
장마 그치고 울타리 밑에
초롱불 밝힌 봉숭아야
무덤에 누워서도 자식 걱정에
마른 풀이 자라는
어머니는 지금 용인에 계시단다
이재무, 위대한 식사
산그늘 두꺼워지고 흙 묻은 연장들
허청에 함부로 널브러지고
마당가 매캐한 모깃불 피어오르는
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겁없이
뛰어드는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 점 떠 있고 냉수 사발 속으로
아, 새까맣게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베어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 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 번으로 꺼뜨리며 사립 나서면
태지봉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쁜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