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꼽추
태양을
꼬옥 껴안았다
생은 그 안에서 잠시
오징어 구이처럼 굽이치고
슬픔은
왕릉처럼
길이
말이 없을 것이다
이승욱, 꿈이 없는 빈 집에는
꿈이 없는 빈 집에는
비스켓 하나라도 바스락거리면
너무 외롭다. 너무 황홀한 꿈이 비스켓 속에
타기 때문. 바스락거리는 비닐껍질을 까고
가는 철사줄 같은 내 아이의 손이 발라내는 비스켓
어찌나 아득하게 소란한 그 소리를
우리의 귀는 잠결에서도 흘려버릴 수가 없다
어쩌면 우리의 손이 더 우그러져 비스켓 공장을 만든다면
이 세상이 다 소란할 비스켓 공장을 만든다면
아내와 나는 이렇게 어지러운 외로움에
걸레조각 같은 적막으로 몸을 닦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장미꽃이 핀 집에 장미는 더욱 아름답고
우그러진 철삿줄은 우그러져서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그렇지만 오래오래, 꿈이 없는 빈 집에는
비스켓 하나라도 바스락거리면
너무 황홀한 꿈이, 거기 불탄다
김명인, 바다의 아코디언
노래라면 내가 부를 차례라도
너조차 순서를 기다리지 않는다
다리 절며 혼자 부안 격포로 돌 때
갈매기 울음으로 친다면 수수억 톤
파도 소리 긁어대던 아코디언이
갯벌 위에 떨어져 있다
파도는 몇 겁쯤 건반에 얹히더라도
지치거나 병들거나 늙는 법이 없어서
소리로 파이는 시간의 헛된 주름만 수시로
저의 생멸(生滅)을 거듭할 뿐
접혔다 펼쳐지는 한 순간이라면 이미
한 생애의 내력일 것이니
추억과 고집 중 어느 것으로
저 영원을 다 켜댈 수 있겠느냐
채석에 스몄다 빠져나가는 썰물이
오늘도 석양에 반짝거린다
고요해지거라. 고요해지거라
쓰려고 작정하면 어느새 바닥 드러내는
삶과 같아서 뻘 밭 위
무수한 겹주름들
저물더라도 나머지의 음자리까지
천천치, 천천히 파도 소리가 씻어 내리니
지워진 자취가 비로소 아득해지는
어스름 속으로
누군가 끝없이 아코디언을 펼치고 있다
이병률, 저울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그건 아마도 저울바늘이 부산하게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
힘차게 심장을 잘라 저울 위에 올려놓으면
바늘은 한 자리에 멎기 전까지
두근 반과 세근 반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요동을 친다는 말
심장을 어디다 쿵 하고 올려놓고 싶어
눈이 멀 것 같을 때
놀랐다 홧홧해졌다가 몸을 식히느라 부산한 심장을
흙바닥도 가시밭도 아닌 그저 저울 위에
한 몇 년 올려두고
순순히 멈추지 않는 바늘을 바라보고 싶다는 말
이덕규, 한밤을 건너가는 밥
빈 그릇에 소복이 고봉으로 담아놓으니
꼭 무슨 등불 같네
한밤을 건너기 위해
혼자서 그 흰 별무리들을
어두운 몸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넣는 밤
누가 또 엎어버렸나
흰 쌀밥의 그늘에 가려 무엇 하나
밝혀내지 못한
억울한 시간의 밥상 같은
창 밖, 저 깜깜하게 흉년 든 하늘
개다리소반 위에
듬성듬성
흩어져 반짝이는 밥풀들을
허기진 눈빛으로 정신없이 주워먹다
목메는 어둠 속
덩그러니 불 꺼진 밥그릇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