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유 역사 게시판은 오랫동안 몇몇 유저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게시물을 올리지 않는 유저들을
환빠니.. 유사 역사학이니 하는 이름으로 닥반테러로 글을 못 올리게 하고 일반 유저들을 떠나가게 한 후에
고구려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아니라느니 하는 요상한 내용만 올라오는 황량한 게시판이 되었습니다
아래의 내용도 전혀 닥반 테러 받을 글이 아님에도 여전히 닥반 테러 받고 있는데요
한번 이 문제 생각해봐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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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의 관련 글들을 읽고 이 글을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2개의 가설 송서 왜 5왕의 진한은 한반도 남부의 국가를 지칭한 것이라는 김태식씨의 주장을 이야기 하였고 ---
가설 A
그것에 대해서 대립되는 가설 송서 왜 5왕의 육국 제군사는 반도의 국가가 아니라 열도안의 반도계열 국가들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 가설 B
김태식씨가 어째서 근거없이 가설 B를 부정하였는지 그 근거는 미스테리입니다만 그것은 그 냥반 개인적인 사정이므로 그냥 미스테리로 남겨두고 우리는 공부를 하도록 합니다 (이유를 알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
게시판에서 강단 사학의 자료로 공부를 해야 하네.. 하고 강하게 주장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보아왔듯이 별 영양가 없고.. 그냥 역사에 정말 관심이 있다면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 아닐까 합니다. 최근에 불쌍한 일제시대 위안부 할머니들을 일본군의 동반자적 관계?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한 사람도 어쨋든 강단에 서는 사람이었습니다만, 그 사람이 일문학 권위자니까 아 네.. 하면서 고개 숙여야 하는걸까요.. 아닐겁니다. 공부는 어차피 혼자 하는 겁니다.
위의 제 글을 요약하면 송서 왜 5왕이 가라 신라 임나 진한 모한 왜 육국 제군사를 요청했을 때에
한반도에서 4세기 정도에 소멸한 것으로 알려진 진한이 7세기 초 중국 정사에 실제 열도를 방문한 중국 사신에
의해서 진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열도에 있었던 것을 추측했는데요. 이것에 대한 검증방법으로..
풍림화산은 한번 정도 신찬성씨록을 찾아보자고 이야기 드렸는데요 .. 혹시 찾아보신 분들 있다면 감사합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신찬성씨록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일본 조정은 이후 10년 만에 성씨록을 새로 편찬해 질서를 바로 세우려고 했다. 815년에 작성된『신찬성씨록』은 일본 지배층의 성씨 1,182개를 담고 있는데 황별 335개ㆍ신별 404개ㆍ제번 326개ㆍ미정잡성 117개 성씨가 실려 있다. 황별은 천황가의 후손, 신별은 진무천황 이전의 신들의 후손, 제번은 한반도와 중국 출신의 도래계, 그리고 미정잡성은 뿌리를 알 수 없는 기타 성씨다. 그런데『신찬성씨록』의 서문에는 3별은 “원래 삼체(三體)로서,” “3별의 차이는 앞뒤의 순서가 다를 뿐... 본래의 뿌리는 동일한 3체”라고 기록돼있다. 즉 미정잡성을 제외한 황별ㆍ신별ㆍ제번은 모두 한 뿌리라는 것이다.
3별의 대부분이 본래 한반도 출신이었지만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성씨를 유리하게 바꿨다. 6세기 중엽 가야가 신라에 멸망하자 많은 가야계 도래인이 백제 계통으로 갈아탔다. 7세기 중엽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을 때는 가야ㆍ백제ㆍ고구려계 도래인이 중국 계통으로 갈아타거나 일본계 성씨를 차용했다.『신찬성씨록』에 중국계 도래인이라고 돼있는 177개 성씨 가운데 당 출신 13개 성씨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은 본래 한반도계 성씨였다. 대표적으로 하타씨가 진나라 출신으로 돼있지만,『일본서기』ㆍ『고유습어』(807년 편찬)ㆍ『신찬성씨록』에는 하타씨의 조상인 궁월군이 백제계로 나온다. 백제계였지만 후에 진나라계로 바꾼 것이다. 김은택은『신찬성씨록』에 수록된 1,182개 성씨 가운데 1,012개가 한반도계라고 한다. 이는 전체의 86%를 차지하는데, 현재 긴키지방에 살고 있는 일본인의 90%가 북방계라는 유전학적 통계와 맞아 떨어진다.
산성국(山城國)의 제번(諸蕃) 중 한(漢)출신 진(秦)의 씨(氏)는 기촌(忌寸)의 성(姓)을 가졌다. 태직공숙녜(太秦公宿禰)와 같은 조상이다. 진시황제(秦始皇帝)의 후예다. 공지왕(功智王), 궁월왕(弓月王)은 예전천황(譽田天皇)【시(謚) 응신(應神)】14년에 내조(來朝)해 상표(上表)하여 고쳐 귀국(歸國)해서 127현(縣)의 백성(伯姓)을 귀화(歸化)시키며 아울러 금은옥백(金銀玉帛)과 종종보물(種種寶物) 등을 바쳐 천황(天皇)이 이를 기뻐하여 대화조진(大和朝津) 사이 액상지(腋上地)를 사(賜)하여 거하게 했다. 남(男) 진덕왕(真德王)과 차(次) 보동왕(普洞王)【고기(古記)에 포동군(浦東君)】은 대초료천황(大鷦鷯天皇)【시(謚) 인덕(仁德)】의 어세(御世)에,파타(波陀:하타)를 사성(賜姓)했는데 지금 진(秦)의 훈(訓-뜻)이다. 차(次) 운사왕(雲師王), 차(次) 무량왕(武良王), 보동왕(普洞王)의 남(男) 진주공(秦酒公)을 사성했다. 대박뢰치무천황(大泊瀨稚武天皇)【시(謚) 웅략(雄略)】의 어세(御世)에,주(奏)하여 칭(稱)하기를 "보동왕(普洞王) 때,진(秦)의 백성이 대개 협박과 침략을 받았고 지금 보니 열에 하나도 보존하지 못하니 청(請)컨데 칙사(敕使)를 보내 검괄초집(撿括招集)하십시오"라 해서 천황(天皇)이 사신(使臣) 소자부뢰(小子部雷)와 대우아다준인(大隅阿多隼人) 등을 보내 찾아모으게 하여 진씨(秦氏) 92 부(部) 18,670명을 술을 사(賜)하여 진(秦) 백성을 양잠직견(養蠶織絹)하게하니 성(盛)히 궁궐에 이르러 진공(進貢)하니 산악(山岳)처럼 조정에 쌓여 천황(天皇)이 이를 기뻐하여 특히 총명(寵命)을 내려 우도만좌(禹都萬佐:우소마사)로 사호하였다. 이 채움의 이익(利益)의 뜻으로 여러 진씨(秦氏)를 팔장대장(八丈大藏)을 궁궐 옆에 차리도록 하는 역(役)을 시켜 공물(貢物)을 납부하게 하여 그런 고로 그 땅을 장곡(長谷) 조창궁(朝倉宮)으로 이름지었다. 이 때 처음 대장관원(大藏官員)을 두어,주(酒)로 장관(長官) 진씨(秦氏) 등의 일조자손(一祖子孫)으로 삼고 혹은 거주(居住)하거나 혹은 행사(行事)를 의지했으며 따로 천평(天平) 20년 경기(京畿)에 있는자로 다 이미길성(伊美吉姓)을 개사(改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