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향림, 어떤 개인 날
낡고 외진 첨탑 끝에 빨래가
위험하게 널려 있다
그곳에도 누가 살고 있는지
깨끗한 햇빛 두어 벌이
집게에 걸려 펄럭인다
슬픔이 한껏 숨어 있는지
하얀 옥양목 같은 하늘을
더욱 팽팽하게 늘인다
주교단 회의가 없는 날이면
텅 빈 돌계단 위에 야윈 고무나무들이
무릎 꿇고 황공한 듯 두 손을 모은다
바람이 간혹 불어오고
내 등 뒤로 비수처럼 들이댄
무섭도록 짙푸른 하늘
이희중, 손톱 발톱 머리카락 털
내가 살아 있구나 손톱이 자라고
몸이 무언가 하고 있구나 발톱이 자라고
쓸데없이 자라고 빠지는 것들
저희들끼리 몰래 자라고 빠지고
혹시 내가 저를 기르고 싶어지지 않을까
기다리며 중얼거리며
그것들은 내 몸의 가장 먼 곳에 있다
변두리에 산다 바깥을 향하고
무서워라 발톱은 결국 신발을 찢고
손톱은 발바닥을 할퀴고
머리카락은 하늘을 가리고
털은 온몸을 죄고 결국
내가 죽은 후에도 더 오래 자랄 것이다
이수명, 면도
벽 속에 그의 수염이 있다
벽 속에 그의 얼굴이 있다
벽 속에 끝나지 않는 하루가 있다
깎아내야 할 순간들이 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벽 속에 모든 것을 밀어넣는다
밀어넣는 자신의 동작까지
남김없이 넣어버린다
그리고 한밤중에 몰래 일어나
벽 속에 들어가서
그는 자신의 수염을 깎는다
수염에 덮여 있는 얼굴을 깎는다
얼굴에 섞여 있는
얼굴이 되지 못하는
얼굴
그 낯선 것은 얼마나 뒤늦게 떠오르는 것일까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 것일까
깎인 얼굴들이 세면대로 떨어진다
뾰족한 얼굴들
새파란 얼굴들
어제보다 긴 얼굴을 달고
그는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는 것은 얼마나 신기한 일일까
유홍준, 흉터 속의 새
새의 부리만한
흉터가 내 허벅지에 있다 열다섯 살 저녁때
새가 날아와서 갇혔다
꺼내줄까 새야
꺼내줄까 새야
혼자가 되면
나는 흉터를 긁는다
허벅지에 갇힌 새가, 꿈틀거린다
김혜수, 질주
궤도 밖으로 이탈할 위험이 없는 생은 위험해
위태로운 믿음을 안전띠로 착용하고
너는 달린다
수많은 사람들을 추월하며
추월한 사람에게 다시 추월당하며
유리창 밖의 배경을 세트처럼 갈아 끼우며
거대한 전자오락실에 앉아
무한 쪽으로 핸들을 꺾는 너
게임오버의 신호를 기다리며
너의 위험과 동행중인 나
볼록거울의 초점거리 안으로 달려간다
사고 다발지역 속도를 줄이시오
바늘이 백육십 킬로를 넘어서고 있다
너의 표정은 덤덤하다
달리고 달리지만 우리는 정지해 있다
속도 없는 속도의 한 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