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진이는 얼마전소개팅에서 대어를 낚았다고 자랑했었다. 자칭 여자사냥꾼이자 낚시꾼인 상진이의 연애진도가 궁금해 던진 질문이었으나 예상외로 반응이 시큰둥했다.
"누구? 한둘이어야지. 요즘 형이 소개팅 시장의 블루칩인 거 알면서!"
"아니 왜, 각선미 최고라고 하던."
"아, 그 개념 없는 애?"
"왜? 처음엔 그렇게 좋다고 하더니."
"외모는 마음에 드는데, 개념이 아예 없는 거지. 지가 무슨 공주인 줄 안다니까."
"예쁘면 다 용서된다며?"
"정도껏 해야지. 걔랑 있으니까 무슨 마님 모시고 다니는 돌쇠가 된 것 같더라. 돈 문제만 해도 그래. 아 물론, 내가 남자고 오빠니까 당연히 쓰는 게 맞지. 근데 보람이 없잖아. 영화를 보여줘도'흥', 비싼 밥을 먹여줘도'흥', 밥값보다 비싼 커피를 대령해도'흥', 도대체가 고맙다는 말을 안해.' 오빠, 영화 재밌게 잘 봤어요. 오빠, 저녁 진짜 맛있긴 했는데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이런 접대성 멘트가 그렇게 어렵냐? 그리고 몇날 며칠을 만나면서 걔지갑은 구경도 못 해봤다. 어느 정도 얻어먹었으면 커피 정도는 사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거 아니야? 멀찌감치 떨어져서 거울이나 보고 있더라니까. 지가 계산한다고 해도 내가 어련히 말릴까. 연애라는 게 알콩달콩한 맛이 있어야지 말이야. 아무튼 걔 만나고 형, 며칠 동안 허리도 못 폈다."
"야! 숨 좀 쉬면서 말해."
상진이는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며 소개팅 여성에게 쓴 돈을 아까워했다. 솔직히 데이트 비용에 대한 갈등이 어디 한두 커플의 이야기일까? 7년이나 사귄 현지랑도 이런 문제 때문에 종종 마음이 상하곤 한다.
"오빠, 뮤지컬 진짜 재밌었어! 나중에 또 보자."
"그, 그럴까?"
'미쳤냐? 똑같은걸또보게? 티켓값 뻔히 알면서…….'
"오빠, 배고파. 우리 오랜만에 고기 썰러 갈까?"
그날 우리는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이를테면 생일이나 기념일에 가곤 하는 레스토랑에 갔다.
'얘가 웬일이야. 보너스 받았나?'
"간만에 요리다운 요리 먹었네. 역시 여기 스테이크는 예술이야. 그치, 오빠?"
"응. 오늘은 특히 더 맛있는 것 같다. 이제 슬슬 일어날까?"
"잠깐, 나 화장실 갔다 올게."
'카드나 좀 주고 가지. 내가 대신 계산하고 기다리면 되는데……. 얼마나 나왔을라나? 헉, 꽤 나왔네. 여긴 다 좋은데 너무 비싸서 탈이야. 근데 왜 영수증을 내 앞에 놓는 거야? 기분 나쁘게. 놓기 애매하면 그냥 가운데에 놓지. 생각하니까 기분 나쁘네.'
나는 현지가 잘 볼 수 있도록 영수증을 치켜들고 최대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나 현지는 좀체 지갑을 꺼낼 의사가 없는 듯 보였다. 드디어 카운터에 도착.
'뭐하니? 오빠 카운터에 도착했잖아. 어서 계산해야지.'
계산하는 사람이 음식은 맛있었는지 물어봐주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금액 이야기만 하고 있다. 마음이 급하다. 식은땀도 난다.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한다. 지갑이 겉옷 안주머니에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괜히 바지 뒷주머니부터 뒤진다. '이건 내가 계산할게!'라는 구원의 목소리를 기대하면서……. 그러나,
"잘 먹었어, 오빠."
"……"
"아, 맞다! 뮤지컬 오빠가 보여준 거지? 내가 낼 걸 그랬다. 우리 오빠 무리했네? 하긴 오빠 돈이 내 돈이고, 내 돈이 오빠 돈이니까. 헤헤."
'설마! 내 돈은 네 돈이고, 네 돈은 네 돈일뿐이겠지.'
저자 피정우는 사회학을 전공하고 팝 칼럼니스트를 거쳐, 현재 작가로 일하고 있다. 장르를 불문한 사랑 노래를 즐겨 듣고, 새로 개봉되는 로맨스 영화를 빠짐없이 챙겨 보며, 순정 만화에 열광하고, 쌍쌍바를 즐겨 먹는 제법 순수한(?) 연애 마니아. 대학 시절 학교 방송국 아나운서로 활동했고, 방송을 통해 학우들의 연애 고민을 상담하면서 극히 소수의 고정 팬을 얻기도 했다. 상대가 누구든 만난 지 5분 안에 그들의 연애사를 캐물을 수 있는 뻔뻔함의 소유자. 그 결과, 지인들에게 무허가 연애 카운슬러라는 별명을 얻기에 이른다. 그는 오늘도 자신의 신조를 사람들에게 세뇌한다. '연애할 수 있어 인생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