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이, 초승달
한 사흘
열기운에 쌔근대는 아이 곁에서
눈뜨지 못하고
뜨거워지기만 하는 그믐 지새웠다
내 눈 속에도 조그마한 샘 솟아나
가만히
세상을 비쳐보는
만물의 깊은 눈
트인다
강윤후, 서울
나이를 먹는 건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
열차가 한강을 건너고 있다
변기에서 물이 빠져나가듯
스무 살이 수월하게 멀어진다
나는 휴대용 녹음기의 테이프를 갈아끼우고
한껏 볼륨을 올린다
리시버는 내 귀에 깊고
서늘한 동굴을 낸다
새떼가 우르르 시간을 거슬러 날아가고
철제 계단을 울리며
지하로 내려가는 구둣발 소리
아우성처럼 쏟아지는 오색종이를 맞으며
살아갈 날들이
완전군장을 한 채 진군해온다
열차가 서울역에 닿으면
서른 살이 매춘부처럼 호객하며
나를 따라 붙으리라
진은영, 벌레가 되었습니다
내 방이었습니다
구석에서 벽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천장 끝에서 끝까지
수십 개의 발로 기었습니다
다시 벽을 타고 아래로
바닥을 정신없이 기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다리를 가지고도
문을 찾을 수 없다니
밖에선 바퀴벌레의 신음 소리
아버지가 숨겨둔 약을 먹은 것입니다
어머니 내 책상 위에
아버지가 피운 모기향 좀 치우세요
시집 위에 몸 약한 날벌레들
다 떨어지잖아
동생 문 열고 들어옵니다
나는 문밖으로
재빨리 나가려고
동생이 소리질렀습니다
여기 또 있어
조은, 한 번쯤은 죽음을
열어놓은 창으로 새들이 들어왔다
연인처럼 은밀히 방으로 들어왔다
창틀에서 말라가는 새똥을
치운 적은 있어도
방에서 새가 눈에 띈 건 처음이다
나는 해치지도 방해하지도 않을 터이지만
새들은 먼지를 달구며
불덩이처럼 방 안을 날아다닌다
나는 문 손잡이를 잡고 숨죽이고 서서
저 지옥의 순간에서 단번에 삶으로 솟구칠
비상의 순간을 보고 싶을 뿐이다
새들은 이 벽 저 벽 가서 박으며
존재를 돋보이게 하던 날개를
함부로 꺾으며 퍼덕거린다
마치 내가 관 뚜껑을 손에 들고
닫으려는 것처럼
살려는 욕망으로만 날갯짓을 한다면
새들은 절대로
출구를 찾지 못하리라
한 번쯤은 죽음도 생각한다면
이경, 세든 봄
세들어 사는 집에 배꽃이 핀다
빈 손으로 이사와 걸식으로 사는 몸이
꽃만도 눈이 부신데 열매 더욱 무거워라
차오르는 단맛을 누구와 나눠볼까
주인은 어디에서 소식이 끊긴 채
해마다 꽃무더기만 실어보내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