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붉은 장미꽃다발
네 꿈의 한복판
네 온몸의 피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그곳
그곳에서 나는 눈을 뜰래
네 살갗 및 장미꽃다발
그 속에서 바짝 마른 눈알을 치켜뜰래
네 안의 그 여자가 너를 생각하면서
아픈 아코디언을 주름지게 할래
아코디언 주름 속마다 빨간 물고기들이 딸꾹질하게 할래
너무 위태로워 오히려 찬란한
빨간 피톨의 시간이 터지게 할래
네 꿈의 한복판
네 온몸이 숨이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그곳
그곳의 붉은 파도 자락을 놓지 않을래
네 밖의 네 안, 그곳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래
권현형, 독한 연애가 생각나는 밤
함부로 슬픔을 내보이지 않는 자의
혀가 저리 흰가
독한 연애의 끝이
저리 무심한가
어둠 속 흰 박꽃 같은 눈송이는
어떤 내성(內省)을 닮아 있다
백두산 어느 골에 산다는
우는 토끼의 눈망울이 생각나는 밤
우는 토끼라는 서글픈 학명처럼
눈 내리 퍼붓는 깊은 산골짝서
이승의 한철을 홀로 견뎌야 하는
순한 짐승의 독한 발자국을
따라가 보느라
잠이 오지 않는 밤
진짜 연애는 칼날을 삼킨 듯 아파도
혀끝으로 나불거리는 게 아니라던가
선배의 연애론이 생각나는
함박눈 내리는 밤
명치끝이 저려 와
불도 켜지 않고
뜬 눈으로 가만 앉아 있다
강은교, 바리데기의 여행노래
저 혼자 부는 바람이
찬 머리맡에서 운다
어디서 가던 길이 끊어졌는지
사람의 손은
빈 거문고 줄로 가득하고
창밖에는
구슬픈 승냥이 울음소리가
또다시
만리길을 달려갈 채비를 한다
시냇가에서 대답하려무나
워이가이너 워이가이너
다음날 더 큰 바다로 가면
청천에 빛나는 저 이슬은
누구의 옷 속에서
다시 자랄 것인가
사라지는 별들이
찬바람 위에서 운다
만리길 밖은
베옷 구기는 소리로 어지럽고
그러나 나는
시냇가에서
끝까지 살과 뼈로 살아 있다
최정례, 화투(花鬪)
슬레이트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뚝 또 뚝 떨어지구요
창에 기울은 오동꽃이 덩달아 지네요
종일 추녀물에 마당이 파이는 소리
나는 차배달 왔다가 아저씨와
화투를 치는데요
아저씨 화투는 건성이고
내 짧은 치마만 쳐다보네요
청단이고 홍단이고
다 내주지만
나는 시큰둥 풍약이나 하구요
창 밖을 힐끗 보면
오동꽃이 또 하나 떨어지네요
집 생각이 나구요
육목단을 가져오다
먼 날의 왕비
비단과 금침과 황금 지붕을
생각하는데
비는 종일
슬레이트 지붕에 시끄럽구요
팔광을 기다리는데
흑싸리가 기울어 울고 있구요
아저씨도 나처럼 한숨을 쉬네요
이매조가 님이란 건 믿을 수가 없구요
아저씨는 늙은 건달이구요
나는 발랑 까진 아가씨구요
한심한 빗소리는 종일 그치지를 않구요
이문재, 내 안의 식물
달이 자란다 내 안에서
달의 뒤편도 자란다
밀물이 자라고 썰물도 자란다
내 안에서 개펄은 두꺼워지고
해파리는 펄럭거리며
미역은 더욱 미끄러워진다
한켠에서 자라도 자란다
달이 커진다
내 죽음도 커지고
그대 이별의 이후도 커진다
죽음의 뒤편도 커지고
이별 이전도 커진다
뿌리만큼 거대한
내 안의 식물 줄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