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민복, 식목일
사람들이 공중에 미래를 그려 보는 날
나무들이 산 채 누워 거리를 질주하고
도살장으로 가는 한 트럭 돼지들이
마지막으로 벌이는 죽음의 카퍼레이드
어려서 가출하다가 꺾꽂이 해 놓은 미루나무 뽑아
길바닥에 써 보았던 그 여자애 이름
심어지는 것들
심어지는 것들
길 위에서
뿌리 열 개를 꼼지락거려 보는
신달자. 백치 애인
나에게는 백치 애인이 있다
그 바보됨됨이가 얼마나 나를 슬프게 하는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는지 모른다
별볼일 없이 정말이지 우연히 저를 만날까봐서
길거리의 한 모퉁이를 지켜 서서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제 단골다방에서 다방 문이 열릴 때마다
불길 같은 애수의 눈물을 쏟고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또는 시장 속에서 행여 어떤 곳에서도
네가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착각 속에서
긴장된 얼굴을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이 안타까움을 그는 모른다
밤이면 네게 줄 편지를 쓰고 또 쓰면서
결코 부치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을
그는 모른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장님이며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며
한 마디도 하지 않으니 그는 벙어리다
바보애인아
고진하, 빙어
그 어느 날 강가에서
속없는 은빛 날고기를 먹었었지
속이 한한 널 처음 보며 얼마나 눈부셔했던가
나무젓가락으로 펄펄 살아 뛰는 너를 집어
초고추장에 휘휘 저어 먹으며 얼마나 찜찜해 했던가
먹고 먹히는 것이 산 것들의 숙명이라지만
감출 죄의식조차 없이 투명한 생(生)을
너무 사납게 씹고 또 씹었던 것은 아닌가
먹을 것이 왜 하필 여리고 속없는 것이어야 했던가
속없으니 뒤탈 없을 거란 생각을 했던가
아작아작 투명한 것을 씹어
불투명한 세상을 비웃어주고 싶었던가
물의 길을 따라가다 재수 없게 걸려온 생이
미로의 창자 속으로 들어가 무엇이 되었던가
비계와 똥이 되었던가
미로 속 미궁을 깨부수는
통쾌한 유머 같은 것이 되었던가
속 다르고 겉 다르지 않은 투명인간이 되었던가
혹 배탈 같은 뒤탈은 없었던가
가을 하늘처럼
속없이 눈부셨던 널 떠올리면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자꾸 물어서 뭘 또 건지려 하겠는가
김기택, 소가죽 구두
비에 젖은 구두
뻑뻑하다 발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신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구두는 더 힘껏 가죽을 움츠린다
구두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 적은 없었다
구두 주걱으로 구두의 아가리를 억지로 벌려
끝내 구두 안에 발을 집어넣고야 만다
발이 주둥이를 틀어막자
구두는 벌어진 구두 주걱 자국을 천천히 오므린다
제 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소가죽은 축축하고 차가운 발을 힘주어 감싼다
조말선, 정오
오븐의 채널이 정각에서 멎는다
늦은 아침이 다 구워졌다
꽃나무 밑에서 놀던 적막은 바싹 익었다
밀가루에 버무려진 세상이 거짓말같이 부풀어 오르는 시각
우체부가 달아오른 우체통을 열고
뜨거운 편지를 꺼낸다
삼십분 전에 넣은 편지가 벌써 익다니
생의 한나절을 다 읽기도 전에
나는 또 숙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