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00원..
지금 내 통장 잔액이다.
내 주머니 사정이 이러한 것은 하루이틀일은 아니지만
통장을 볼때마다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일이었다.
단칸방에서 막일을 전전하며 입에 풀칠하는 비루한 인생.
어릴때부터 거칠고 지저분하게 살아온 결과란 것이 결국은 다 이런 것일거다.
오늘따라 밀려오는 우울한 감정에 잠이오지 않았던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금은 그저 이 어둡고 눅눅한 단칸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소주와 과자따위를 사들고 한강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언젠가부터 답답 할때마다 한강에서 혼자 술을 마시곤 했다.
항상 앉던 자리에 자리를 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사람은 별로 없었다.
연신 소주를 들이켜 슬슬 취해갈 때 쯤, 내 눈에 한 남자가 보였다.
나이는 40대 중반쯤 되었을까?
정장차림의 그 남자에게서는 세상을 등지려는 사람의 암울함이 느껴졌다.
나도 살아가는데 저 남자는 무엇 때문에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 졌다.
텅 빈 술병을 옆에 놓고 그 남자를 관찰했다.
한강물을 지긋이 바라보던 그 남자는 뭔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강물쪽으로 걸어갔다.
손에 무언가 종이를 들고있는것이 분위기상 유서처럼 보였다.
역시 물에 뛰어들어 자살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저 사람이 자살하건 어쩌건 내 알바는 아니지만 그와 한번은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 남자에게 걸어갔다.
“저기 아저씨!”
내가 부르자 그 남자는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물에 뛰어들려는 모양인데, 내가 얘기 좀 들어줘도 되겠어요?”
내말에 그 남자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 앉았다.
난 그 남자의 옆자리에 앉아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잠시 뜸을 들인 그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쪽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날 말리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내 말해드리리다.”
남자는 답답한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말했다.
“참 웃기지. 지금은 내가 이런 꼴이지만 한때 참 행복했었다 이말이오.
어릴때는 그냥 뭣도 모르고 죽어라 공부만 열심히 했다오.
그때야 힘들었지만 나중에 좋은데 취직해서 잘 살게 되니 그냥 좋았소.
먹고살만해 질 때 쯤 아내를 만나서 순조롭게 결혼까지 하게되었지.
아내가 아내를 꼭 닮은 딸을 낳았을때는 정말로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았었다오.
근데 그런게 그리 오래가지는 않더구만.”
남자는 목이 타는지 가방을 뒤져 음료수 병 두 개를 꺼내어 하나를 내게 건네주었다.
단숨의 자기몫을 마셔버린 그는 내가 음료를 마시길 잠시 기다렸다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무슨 삼류 드라마같이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해 먼저 떠나게 된거요.
말 그대로 하늘이 다 노래지더구만.
딸만 아니었다면 그대로 아내 따라 여길 떴을거요.
그때부턴 딸을위해 정말 전력을 다해 돈을 벌기 시작했소.
그게 딸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일 때문에 딸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게 되더구만.”
내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그의 이야기가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졸리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이왕 듣기 시작한거 끝까지 한번 들어보기로 했다.
“그러다 일이 터졌지.
늦게 까지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딸이 그만 양아치 놈한테 몸쓸짓을 당하고 만거요.
혼자가기 무섭다고 전화한 아이에게 오늘은 일이 늦게 끝난다고 말했던 내가 정말 미웠소.
딸을 위한다면서 딸이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지 못했던 거요.
당장에 일을 그만두고 상처받은 딸에게 매달렸지.
하지만 이미 딸아이는 무언가 무너져버린 상태였소.
한달을 못가 딸은 스스로 지 어미 따라 세상을 떠나버렸지.
그 어린게 욕실에서 목을 매달았단 말이요.
그걸 본 내 심정이 어땠겠소?"
거기까지 이야기한 남자는 들고있던 종이를 내게 보여줬다.
“딸내미 잘 보내주고나니 더 이상 살고싶지 않더군. 이제 여길 뜰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지.
이미 유서까지 쓰고 왔소.
당신이 말린다고 해서 어떻게 될건 아니니 혹시라도 말릴 생각이면 그만두는게 좋을거요.”
물론 특별히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저 이사람이 과연 나보다 불행한 인생을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기에 말을 걸었을 뿐이다.
“말리진 않겠습니다. 다만 제가 그 유서 좀 봐도 되겠습니까?”
혹시라도 뭔가 도움이 될만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제법 잘나갔던 사람이니, 마지막 가는 길 봐준 사람에게 얼마쯤 돈을 줄지도 모를 일이다.
남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흘끗 시계를 보곤 천천히 유서를 건네주었다.
유서를 펼쳐 가만히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유서에 써있는 것은 지금까지 남자가 했던 이야기가 아니었다.
유서에는 일용직 근무자로 전전하다 한 아이를 죽음으로 내몬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른 한 사내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 어리둥절 하던차에 눈앞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글씨도 읽지 못할때쯤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다만 죽기전에 내딸에게 몹쓸짓을한 그 찢어죽일 놈을 찾아서 어떻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눈을 감지못할거 같단말이지.
다행히 그건 잘 해결할수 있을거 같구만.”
남자는 비틀거리는 나를 가볍게 밀쳐 넘어트리곤 양쪽 신발을 모두 벗겨내었다.
그리곤 벗겨낸 신발을 나란히 정리하고,
내가 들고있던 유서를 지문이 묻지 않게 조심스레 접어 신발 아래 깔았다."
그제서야 난 깊은곳에 묻어놨던 기억을 떠올렸다.
늦은밤 혼자 걸어가던 여고생....
으슥한 곳으로 그아이를 끌고갔던 기억.....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난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