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교, 흰 눈 속으로
여보게, 껴안아야 하네
한 송이 눈이 두 송이 눈을 껴안듯이
한데 안은 눈송이들 펄럭펄럭 허공을 채우듯이
여보게, 껴안아야 하네
한 조각 얼음이 두 조각 얼음을 껴안듯이
한데 안은 얼음들 땅 위에 칭칭 감기듯이
함께 녹아 흐르기 위하여 감기듯이
그리하여 입맞춰야 하네
한 올 별빛이 두 올 별빛에 입맞추듯이
별빛들 밤새도록 쓸쓸한 땅에 입맞추듯이
눈이 쌓이는구나
흰 눈 속으로
한 사람이 길을 만들고 있구나
눈길 하나가 눈길 둘과 입맞추고 있구나
여보게, 오늘은 자네도
눈길 얼음길을 만들어야 하네
쓸쓸한 땅 위에 길을 일으켜야 하네
전순영, 빛과 어둠이 가고 오는 길목에서
가랑잎이 듯 언니를 소각로 속으로 밀어넣고
나는 그 밑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내 오른 팔이 잘려나갔는데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내 손이 밥을 이렇게 잘 퍼 나르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내 입이 자물쇠를 채우지 않은 것일까
검은 구름 떼가 언니를 싣고 간다
잘 가 언니
언니가 가는 그곳에는 방울토마토처럼 매달린 가난도
평생 속을 썩이는 아들도 소처럼 멍에를 지우고 말처럼 수레를 끌리던
남편도 없는, 그곳으로 훨훨 날아서 어여 가
나 역시 내일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제의 나로 돌아갈 거야
언니 아무도 동행해주지 않은 길 혼자 가
내가 흔들릴 때 말없이 등을 내어주던
계곡으로 떨어졌을 때 몸을 던져 손 내밀어주던 나의 오른팔
박하사탕처럼 싸하게 번져오는 이 빈 가슴을
어떻게 해
얇은 이 겨울 햇볕에다 나를 널어볼까
겨울 바다에 가서 날려 보낼까
나 어떻게 해 언니
허청미, 내 중심은 늘 사선이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단단하다
그 계단을 밟고 나는 날마다 전동차를 탄다
전동차 속 바닥이, 천장이 흔들리고
의자와 손잡이가 흔들리는 속에서
나는 흔들리고 있다
때로는, 육중한 지상의 강다리를 흔드는
전동차 안에서 나는 보았다
강물이 유속을 따라 결이 되는 것을
빛으로 자맥질하다 익사하는
황홀한 윤슬의 마지막 섬광을
흔들리다 기울어지는 수많은 직립의 영장들이
문이 열릴 때마다 슬어 놓은 알들이 된다
차가운 바닥에 부려진 것들의
중심은 모두 사선이다
나는 꼿꼿하게 중심을 잡아보지만
자꾸만 내몸은 앞으로 굽어져
관성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매번 출구로 올라가는 돌계단은 출렁다리처럼 흔들려
햇빛 쏟아지는 지상에서 여전히 기우는 내 중심
길들이, 가로수가, 편의점까지
곧게 서 있는 것들 하나도 없다
나는 세상 속으로 흐르는 결이다
내 안에는 아직 쓰러지지 않은
피사의 사탑이 있다
엇박자로 흔들릴 때 부딪치기도 하는
내 중심은 늘 사선이다
신형건, 입김
미처
내가 그걸 왜 몰랐을까
추운 겨울날
옴을 움츠리고 종종걸음 치다가
문득, 너랑 마주쳤을 때
반가운 말보다 먼저
네 잎에서 피어나던
하얀 입김
그래, 네 가슴은 따뜻하구나
참 따뜻하구나
진은영, 고흐
왼쪽 귓속에서 온 세상의 개들이 짖었기 때문에
동생 테오가 물어뜯기며 비명을 질렀기 때문에 나는 귀를 잘라버렸다
손에 쥔 칼날 끝에서
빨간 버찌가
텅 빈 유화지 위로 떨어진다
한 개의 귀만 남았을 때
들을 수 있었다
밤하늘에 얼마나 별이 빛나고
사이프러스 나무 위로 색깔들이 얼마나 메아리치는지
왼쪽 귀에서 세계가 지르는 비명을 듣느라
오른쪽 귓속에서 울리는 피의 휘파람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커다란 귀를 잘라
바람 소리 요란한 밀밭에 던져버렸다
살점을 뜯으러 까마귀들이 날아들었다
두 귀를 다 자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멍청한 표정으로 내 자화상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