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승, 별
우리는 이젠
그동안 우리가 썼던 말들을
쓰지 않을지 모른다
사랑한다는 말
외롭다는 말
그리고
그립다는 말
밤이면 기관포처럼
내 머리 위로 쏱아지는
별
박정대, 그대 집
창포 강에 싸락눈이 내리는 오후
그대는 물을 긷고 나는 듣고 있었네
그대 발길에 스치는 조약돌의 음악 소리
아득한 산맥을 넘어온 시간의 풍경 소리
내 마음이 가고 싶어하던 곳에서
오롯이 돋아나던 낮은 숨결의 불빛들
그 희미한 불빛의 계단을 살풋이 밟으며 내려오던
싸락눈, 싸락눈, 싸락눈의 화음
창포 강에 싸락눈이 내리는 오후
그대 물동이에 담겨
나 여기 그대 집까지 왔네
그대는 검은 천막에 사는 여인
오늘 저녁 그대는
또 한 줌의 쌀을 끓이네
저물어가는 창포 강가엔 아직도 눈이 내리는데
눈밭 속으로도 또 다른 눈이 내리는데
천막 속의 고요, 고요 속의 음악
나는 끓고 그대는 웃네
그대 집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이제사 그대의 입술 끝에 닿은
나, 고요한 한 잔의 창포 강
유안진, 남산[南山]길
찬비 뿌리는 가을날에는
옷자락이 다 젖도록
남산 길을 걸으리라
홀린 듯이 이끌리는 발길 문득 멈추고
돌층계에 엎드려 우는
낙엽 한 장 주우리라
주소도
사연도 없는
그저 기러기 피빛 울음인
사모치거라
사모치거라 이 못난 짓
지워지지 않거든 더욱 사모치거라
인연 비록 엇갈린 길목이었다 해도
걷고 걷다가
가랑잎으로 누우리라
맹문재, 나는 언제까지 책을 골라올까
나는 여전히 서점에서 '혁명'의 책들을 골라오지만
거의 읽지 않는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재미를 들여서도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에 몰두해서도
노동자 투쟁 같은 실천행동에 바빠서도 아니다
나는 화투에 중독된 노름꾼처럼 시간을 뒤적이느라
책을 읽지 않는 것이다
시간에 빠진 나는
시간을 보고 시간을 듣고 시간을 추종하느라 정신이 없다
오늘도 시간은 온화한 목소리로
내게 잘못이 없더라도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림자만큼 제자리를 지키라고
불행을 예방주사처럼 맞으라고
내게 기도하듯 들려준다
나는 시간의 당부를 들을 때마다
역정조차 못 내는 진폐환자 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경악하고 부끄러워하며 내팽개친 책을 잡는다
그렇지만 시간의 얼굴이 호수보다 넗고 부드러워
나는 또다시 포기하고 만다
칼끝처럼 서 있던 나의 고집은 어느새
배부른 아기처럼 잠드는 것이다
나는 언제까지 '혁명'의 책들을 골라올 것인가
이영춘, 들풀
세상이 싫고 괴로운 날은
바람 센 언덕을 가 보아라
들풀들이 옹기종기 모여
가슴 떨고 있는 언덕을
굳이 거실이라든가
식탁이라는 문명어가 없어도
이슬처럼 해맑게 살아가는
늪지의 뿌리들
때로는 비 오는 날 헐벗은 언덕에
알몸으로 누워도
천지에 오히려 부끄럼 없는
샛별같은 마음들
세상이 싫고 괴로운 날은
늪지의 마을을 가 보아라
내 가진 것들이
오히려 부끄러워지는
한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