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향, 가로등
가로등 불빛 가득한 한밤의 거리는
붉은 피 흐르는 어둠의 혈관이다
그 거리를 혼자 걸어가는 사람
술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
쓰레기통 뒤지는 고양이
그 옆을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
강물 되어 흐르는 혈관 속 풍경들이
캄캄할수록 환하다
한 길도 안되는 우리들 혈관 속엔
그리움이 소용돌이치는지
서러움이 고여 있는지
낮이나 밤이나 서로 알 수 없는데
사방을 둘러보아도 검게 출렁이는 어둠 속이
수족관처럼 투명하다
강기슭 샛강 같은 수많은 가로등
그런 어둠에게 날마다 수혈중이다
신미균, 웃는 나무
나무가 웃고 있다
자지러지게 웃고 있다
뒤로 넘어가면서 웃고 있다
징글징글하게 웃고 있다
웃다가 웃다가 허리가 끊어지려고 한다
저러다 죽는 것은 아닐까
자세히 보니
새 한 마리
나무에 간지럼을 태우고 있다
나무가 웃는다
바스러지게 웃는다
바삭 바삭 부서진 유리조각처럼
빛을 반사하면서 웃는다
고개를 숙이고 웃는다
듬성듬성 웃는다
자세히 보니
새가 떠나갔는데도
웃고 있다
정끝별, 불멸의 표절
난 이제 바람을 표절할래
잘못 이름 붙여진 뿔새를 표절할래
심심해 건들대는 저 장다리꽃을 표절할래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이 싱싱한 아침 냄새를 표절할래
앙 다문 씨앗의 침묵을
낙엽의 기미를 알아차린 푸른 잎맥의 숨소리를
구르다 멈춘 자리에서부터 썩어드는 자두의 무른 살을 표절할래
그래, 본 적 없는
세상을 향해 달리는 화살의 그림자들을 표절할래
진동용수철처럼 쪼아대는 딱따구리의 격렬한 사랑을 표절할래
허공에 정지한 벌의 생을 떠받치고 선
저 꽃 한 송이가 감당했던 모종의 대 역사와
어둠과 빛의 고비에서
나를 눈뜨게 했던 당신의 새벽 노래를
최초의 목격자가 되어 표절할래
풀리지 않는, 지구라는 슬픔의 매듭을 베껴 쓰는
불굴의 표절작가가 될래
다다다 나무에 구멍을 내듯 자판기를 두드리며
백지의 당신 몸을 표절할래
첫 나무가지처럼 바람 속에 길을 열며
조금은 그렁이는 미래라는 단어를
당신도 나도 하늘도 모르게 전면 표절할래
자 이제부터 전면전이야
유안진, 키
부끄럽게도
여태껏 나는
자신만을 위하여 울어왔습니다
아직도
가장 아픈 속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하여
터져 나오니
얼마나 더 나이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마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