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잘 해놨네~깔끔하고.
설거지 쌓여있다더니 그릇 세 개밖에 없는데 쌓여있다고 했네?
집도 더럽지도 않구만.
.........
니가 꼭 뭐가 안 돼도 돼. 이효리가 그랬잖아. 아무나 되라고. 꼭 지금 무엇이 되겠다고 지금 정하지 않아도 돼.
아무나 돼도 돼.
앞으로 그냥 밥 먹고 살면 뭐 어때. 지금 너 잘 해놓고 살고 있잖아. 방 깨끗히, 냉장고에 반찬들도 차곡차곡 주말마다 잘
만들어놓고 있고,
설거지 쌓아놨다고 하는데 겨우 저것밖에 없으면서 쓰레기같이 해놨다 그러고.
돈 벌고, 그 돈 차곡차곡 잘 모으고 있고, 허튼 데 돈 안 쓰고 아끼고,
너는 너 자신이 신경쇠약이라 그러는데, 괜찮아. 잘하고 있어.
신경쇠약이라 하기엔 집도 깨끗하고 매주 주말마다 해야 할 일 잘 하고 있네. 열심히 여기저기 잘 다니고.
너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검증하고, 엄격하게 평가하는 거면 적어도 조증은 아닌 거지. 그냥 넌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생
각해서 그걸 다 지켜내느라 잠을 적게 잔 거잖아. 그만큼 정신적 소모도 큰 거고.
본인이 잠을 적게 자는 게 신경쇠약인지, 조증인지 스스로 구별한 것도 대단한 거야. 자신이 신경쇠약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많거든.
사람 심리에 대해서 니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을걸?
되게 세세하게 구분을 잘 해. 잘 캐치하고.
그러다보니 나이, 키 맞추는 건 뭐 일도 아니겠지. 원래 눈썰미도 좋은데 그 사람이 꺼내는 대화 주제나 이런 걸 보고,
단순히 근거 없는 자랑을 한다, 이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이 말을 하면서 다른 말을 하는 것까지 다 관찰해
서,
'이 사람은 무슨 병이다.' 까지 파악해 내는 거잖아.
그걸로 본인도 관찰하고. ㅋㅋ
그런 면에서 너는 진짜 대단해. 보통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잖아. 근데 그게 필요해. 너는 그게 절대 약점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니가 보통사람과 달라서, '나는 보통 사람들과 달라서, 사람들이 싫어하고 이상하게 본다.' 이거에 대해서 약점이
라고 생각하면 안 돼.
나는 네가 기자같다고 생각했어. 인터뷰를 굉장히 잘해. 상대가 잘 알 만한, 상대의 필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거든. 너는
진짜 모르는 분야가 없는 것 같아. 어떤 사람을 갖다 놔도 그 사람만 알고 있을 만한 전문적인 분야에 대해서도 넌 이야
기를 꺼내면서, 또 그 사람이 자기 분야에 대해 자랑하면서 설명할 수 있게, 또 보통 사람 수준에 맞춰서 질문을 던지잖
아. 난 네가 그거 일부러 그러나 했어. 얘가 지금 다 알면서, 적당히 보통 사람이 호기심을 가질 만한, 그리고 상대가 전문
적으로 그걸 길게 풀어 말할 만한, 그런 질문들을 하니까. 너는 진짜 기자 같다고 생각했어. 상대방이 잘 알고 있을 분야
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 그래서 대화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하는 것 같아. 되게 재미있어지고 너랑 이야기하면. 너는
또 아는 것도 많고.
뭐, 네가 의도하지 않았고, 정말 그 분야에 대해 실무자에게 더 듣고 싶고, 알고 싶은 게 많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
걸 또 잘 이야기해 주는 사람만 찾아다니는 것 같아. 널 보면. 그런 거 보면 또, 상대가 편안하게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렇다기보다 정말로 네가 알고 싶은 게 많아서 배우고 싶은 게 많아서, 그런 걸 잘 이야기해 줄 만한 사람을 찾는 것 같
기도 해. 니가 꼭 그런 인터뷰하는 기술, 사람과 대화를 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 이런 처세술이 아니라.
재밌잖아. 그런 이야기 듣는 거.
그리고 너는 그러면서 너에 대해 노출을 하지. 뭐, 대화는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give & take 니까, 너는 너를 드러내고,
상대도 자신을 드러내고, 그러길 원하는 것 같아. 물론, 그게 맞고. 그리고, 스스로 약점을 더 과장해서 드러내서, 상대가
어느 정도의 인성을 갖고 있는지 알아내고 싶어하는 것 같아. 물론 그 와중에 상처도 정말 많이 받는 것 같아서 굉장히
안타깝기도 해. 왜 굳이 너를 드러내서 상처를 받으려고 할까, 이해가 안 갈 때도 있어.
가령, "나는 사회생활을 잘 못해, 전략적 사고를 잘 못해, 회사생활을 어려워 해." 라는 말, 안 해도 되는데 이런 이야기를
굳이 드러내서, 또 굳이 자기 스스로 '못 한다.' 라고 말할 건 뭐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거든.
근데 나는 네가 어떤 애인지 아니까, 이걸 왜 말하는지도 알겠어.
아예 그냥 대놓고, 못 한다고 말하고, 그런 모자란 사람을 상대가 어떻게 대하는지 알고 싶은 거잖아.
근데 내가 안타까운 점은 뭐냐면,
그렇게 모자란 사람을, 안타까워하게 여기거나 보듬어주는 사람이 잘 없단 말이지. 없을 뿐더러 나쁘게 보는 거.
거기서 네가 상처 받는 거잖아. 니가 그렇게 인터뷰도 잘 하고 사람들하고 대화도 잘 나누는 좋은 성격인데도.
왜 너를 스스로 낮춰 말해서 상처를 받느냔 말이야.
불안함을 가지는 게, 진짜 많은 상황에서 장애를 가져오지. 너는 불안해 할 필요가 없는 아이인데도 말이야. 내가 봤을 때
는.
너 고등학교때,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 했잖아. 술도 잘 하고.ㅋㅋㅋ
그래도 자존심이 있다고 담배는 안 피우고.
대학교 와서도 운동하고 니 꿈 계속 이어가는 걸 봤을 때 멋있었어. 되게.
그 뒤에 대기업도 척척 붙고, 대학교 교직원 됐다고 했을 때, 나는 이제 니가 결혼만 하면 된다 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이렇게, 작은 것 하나에도 눈물 흘릴 정도로 약해질 줄 몰랐어.
나는 니가, 고등학교 때 너는 눈물이 없는 애인 줄 알았거든. 아예 눈물을 안 흘릴 것 같았어. 어떤 상황에서도 안 울 것
같아서 니가 운다는 게 상상이 안 됐어. 지금도 그래.
물론 네가 마음이 약하고 그런 건 알겠지만 그래도 은근히 또 사회생활 하고 공부하고 이럴 땐 또 되게 강하고, 나약하지
않고,
작은 몸집으로 운동하고 이런 거 보면, 진짜 너는 강해보였거든.
대학교때에도 마찬가지였어. 다 너 쎈캐로 봤지, 약하다고 보지 않았거든.
욕도 잘하고 술도 잘하고, 뭐 너는 마음만 먹으면 다 하는 애 같아서,
얘는 언제 울까? 이게 궁금해질 정도였어.
나 말고도 다들 궁금해했을 걸?
언젠가서부터 서서히 니가 약해지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 얘가 만나서 말수도 적어지고, 너무 조용해서 정말 무슨 일이 있나 싶었어.
근데 올해 돼서 보니까 니가 살이 쪽 빠져 있는 거야.
원래도 날씬하긴 했는데 너무 말라버려서,
물어보니까 잠도 2시간 잔다 하고.
무슨 일 있는 거냐고 물어도 뭐 늘 똑같다고만 이야기하고.
회사 이야기도 들어서 알고 있긴 한데,
난 그것보다도 네가 자신감 없어하면서, 또 너무 너를 엄격하게 대하면서 괴로워하고 있어서,
너 그냥 있는 그대로도 괜찮은 놈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어.
니가 꼭 뭐가 되지 않아도 넌 내 친구야. 언제까지나.
니가 꼭 의대에 가서 의사가 되지 않아도, 교직원이 아니어도, 백수여도, 뭐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도, (실제로는 하고
싶은 게 많은 거 알아) 하고 싶은 게 많지만 잘 할 자신이 없다고 말해도,
어떻게 해도 너는 내 친구야.
자신 없어도 돼. 자신없으니까 포기해, 라는 말이 아니야. 네가 꼭 뭐를 되려고, 더 나이들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이런 말
로 너를 압박하고 곤두세우고 촉박하게 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야.
니가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물으면, 너는 평생 공부만 하고 싶다고 했잖아. 책 읽고 공부하고.
꼭 뭐가 되지 않아도, 지금 그렇게 살아. 꼭 그걸 통해서 뭘 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 매일 공부하고, 매일 책 읽고.
이미 그러고 있잖아.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런 가치에 대해서 너는 관심 없잖아. 그래서 그런 세속적인 주제 이야기하는 거 끼고 싶어하지도
않고, 그런 걸 바라는 사람들하고 대화하는 거 신경쓰고 싶지 않아서 매번 주말에 일부러 시간 없다 잔다 말하고 혼자 돌
아다니잖아. 나한테는 혼자 있고 싶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좀 안 친한 사람들한테는 약속 있다거나 피곤해서 잔다고
거짓말 치고 ㅋㅋ
불안해하지 마. 남들이 그냥 네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가치들을 중요하게 여기니까, 너한테서 이것저것 오해하는 것일
뿐이야.
야, 꼭 뭐가 안 되면 뭐 어때.
니 정신건강이 제일 중요해.
니가 솔직히 백수로 지내면서 매일 너 공부하고 싶은 것 공부하고, 매일 책 읽고, 글 쓰고, 그러면서 시간 보내는 거,
그게 왜 나빠. 그거를 한심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그런 사람들의
눈에 맞춰 살거나, 니가 그 사람들의 눈에 눌려서 기죽지 않아도 돼. 니가 행복하게 사는 삶이 최종 목표인데, 왜 꼭 뭐가
돼야 되냐?
너 안 그래도 열심히 살아왔어.
니가 입사한 회사들, 다 아무나 못 들어가.
야 솔직히 신경쇠약, 우울증이 의치약 선수과목 들으러 주말에 대학교 가서 하루에 12시간씩 강의 듣고 생명과학 학부생
들한테 개설한 수업 회사다니면서 듣는 거, 그거 보통 일 아니야. 우울증인 사람이 그렇게 다닐 리도 없고.
신경쇠약이라 하지만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도 되게 잘 알아.
지금 뭘 결정하지 않아도 돼.
심신이 지쳤으니까.
지금처럼 주말에 콘서트 다니고, 오케스트라 공연 보고, 공부할 것 찾아보고, 잔디밭에 누워 쉬고,
그러면서 지내.
그래도 돼.
사람들하고 대화하고 어울리는 것,
무서워하지 말라고 많은 사람들이 네게 말하겠지만, 무서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굳이 상대를 편하게, 그리고 상대가 원하는 걸 맞춰야 할 필요 없다는 거야.
넌 너무 착해.
그래서 상대가 원하는 대로 배려해주려고 하지.
넌 진짜 그럴 때 보면 진짜 외국에서 온 애같아. 매너 같은 게.
진짜 넌, 같이 학창시절 보냈는데도, 대학교를 다른 데로 가고 니가 외국에 좀 많이 가서 그런지,
매너가 뭔가 외국인같아.
지금 너 보고, 뭐가 되라고 하지 않을게.
어차피 너는 뭐든 니가 하기로 정하면 그걸 해내는 애니까.
여지껏, 지금 32살때까지 줄곧 넌 그래왔던 것 같아. 그걸 해야겠다, 라고 말하고 몇 달 뒤 보면 그게 돼 있어. 늘. 너는 그
랬었어.
그래서 난 니가 지금 놀고 있다 하더라도 걱정이 되지 않아.
물론 다른 사람들은, 지금 니가, 이렇게 힘이 없고, 걱정 많고, 불안해하고, 잘 모르고 이러니까, '별거 없구나' 생각하겠지
.
근데 나는 네가 잘 될 거라는 거 알아. 막연히 '잘 될 거야.' 라는 위로의 말이 아니라,
그냥 너를 보면 니가 이렇게 힘들어해도, 잘할 것 같아. 그래서 너를 보면 뭔가 걱정이 없어.
너희 부모님도 그런 말 하지 않았냐?
야, 이렇게 내면을 들여다보는 사람, 흔치 않아.
다들 겉으로 내보내는 '표현' 만 보고 생각하지, 그게 왜 나왔는지, 얘의 일생을 통틀어 얘는 어떤 애였는데 지금은 어떤
건지, 이런 것까지 생각 못 하지.
솔직히, 이런 사람 찾고 싶은데, 그런 남자가 없어서 연애 안 하고 있는 거잖아. 포기한다는 표현을 썼지만,
니가 안 하는 게 더 맞지. 그리고 솔직히, 가려서 만나야 할 필요도 있는 거고. 너를 한심하게 보거나 앞으로 한심하게 볼
사람을 가려내는 거, 그게 제일 중요한 건데, 대부분은 비슷한 생각들을 하니까, 아예 연애를 안 하려고 하는 거겠지.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넌 호기심이 많은 애니까,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겠지. 알고 싶은 거 많고, 그리고 네가 그렇게
방어적이거나 전시상태일 필요가 없는, 너를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 너 보고 이상하게 느끼거나 특이하다고 하지 않는
사람, 설령 네가 진짜 사회생활을 못 하더라도, 그걸 낮게 보지 않는 사람.
솔직히 사회생활 못 하는 거 아니야 너. 못하지 않아. 너를 보면.
그냥 다른 거지.
사회생활 못 한다는 표현이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사람 심리를 그렇게 잘 알고, 구별해 낼 줄 알고.
사회생활 못한다고 하기엔 너무 말을 유려하게 잘 해.
사회생활할 때 어떤 말을 해서 상대방을 어떻게 의전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고. 사람 파악 잘 하고.
다만 니가 너무 착해서 그렇지.
공격하는 말을 안 하거나 못 하는 게, 사회생활 못 하는 건 아니야.
너, 충분히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껴져서 안 하는 거잖아.
상대방을 기본적으로 신뢰하고.
근데 니가 속한 곳이 사람대 사람을 다 신뢰하지 못하고, 뒷말하고, 그런 사람들이 많으니까 니가 미치려고 하는 거지.
너는 그렇지 않은 애니까.
공격하는 말을 할 필요도 없고, 그에 대한 방어도 할 필요가 없는 사회에서 살고 싶은 거잖아.
크든 작든, 사람들 간에, 목적을 숨기고 에둘러서 표현하고, 또 네가 말하는 것도 곧이 곧대로 안 듣고 꼬아서 듣는 사람
들때문에 불편한 거잖아.
신기하게 너는 기획서나 사업계획서도 잘 쓰고, 남 설득하는 글 되게 잘 쓰고
말도 수려하게 잘 하면서,
여우같은 행동같은 건 또 못 하더라. 일부러 ~척 하는 걸 못한다는 거지. 여우가 곰인 척 하는 줄 알았는데 넌 그냥 곰이
야.ㅋㅋ
일할 땐 철두철미한데 말할 땐 세상 무지한 순둥이 같이 마냥 밝고 사람을 좋아해.
그러니 여우같은 여자애들 사이에서 있을 때 맨날 괴롭힘 당하지. 맨날 오해받고.
물론 양아치같은 남자애들이나 덜떨어지고 이기적인 남자애들 만나면 고생도 할 테고.
야, 남들은 너보고, 너도 좀 맞출 필요가 있다, 너도 그런 걸 좀 배워라, 닮아라 하는데,
니가 꼭 그런 사람들하고 닮아야 돼? 그런 여우같은 거? 난 니가 그런 거 없는 게 더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너 있는 그대로 성격 진짜 괜찮아.
여우같은 여자애들보다 백 배 나아.
니가 거짓말을 하면서 사람을 호구로 보기를 해, 뒤통수를 쳐, 돈을 펑펑 써, 아니잖아?
순둥이 같은 애가 점점 이상한 사람들 만나서 그런 사람들 대처하느라 이상하게 방어적이 되느니,
천천히 책 읽으며 관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네가 꼭 뭘 되려고 하지 않고, 이런 니가 어디에 있어야 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넌 있는 그대로, 괜찮은 애야.
아참, 스트레스 받아서 피아노 친다는 거, 그것도 창피하게 여기지 마. 너 자랑하는 거 아니라는 거 알아. 스트레스가 극
심할 때 피아노 친다고, 계속해서 너는 네가 멋지지 않고 자긴 정신적으로 쇠약해서 피아노를 칠 뿐이라고 자신을 낮추
려고 하는데,
어쨌든 그렇게 피아노에 열중하려고 하고, 스트레스를 나쁜 방식으로 풀려고 하지 않고 좋은 방향으로 풀려고 하는 거잖
아. 그럼 좋은 거지. 니가 스트레스가 극심하다는 게 니가 잘못된 게 아니야. 뭐 스트레스가 심할 수도 있지. 남들에 비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도 있지, 그게 왜 니 잘못이야.
그리고 그런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어딘가에 열중하려고 하는 모습 그 자체가 대단한 거지.
꼭 니가 피아노를 잘 쳐서 멋지고, 예뻐보이고, 그렇다기보다, 네가 스트레스를 굉장히 좋은 방식으로 승화하는 모습이
멋져. 멋진 거야 그거.
자부심 가져도 돼.
잘 치는 건 상관없어. 니가 거기에 열중하느라, 다른 걸 잊고, 피아노 치는 것에 몰입하고 , 다 치고 나면 깨끗히 기분이
가벼워지는 게 중요한 거지. 네가 지금 그런 방식으로 스트레스 푸는 거, 굉장히 좋은 거야.
스트레스 많이 받고 있다고, 네가 나약하다고, 사회에 적응 못 한다고,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마.
어느 정도 나도 이해는 돼, 니가 그렇게 말하는 거. 그렇게 말함으로써, 상대가 너를 한심하게 보는 눈빛을 하는지, 아니
면 안타까워하거나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인지, 그걸 보려는 거잖아.
그래서 일부러, 너를 있는 그대로 허심탄회하게 드러낸다는 거 알아.
혼자 살 생각 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지.
솔직히 너 만나는 남자들, 니가 소개받은 남자들, 다 사짜 들어가는 남자들 아니였냐.
내가 소개해 준 내 친구들이나 동생들만 해도 다 공기업 연봉 쩔고,
니가 따로 소개받은 사람들도 다 사짜 직업이었는데,
또 그 사람들이 더 만나고 싶어하고 결혼도 빨리 하고 싶어하고 너 집에서 놀아도 된다는데도,
넌 그거 답답하다고,
치마 입는 거 좋아하면서도, 치마 입는 여자 좋다고 말하는 남자한테는 일부러 자긴 바지입는데 어쩔꺼냐고 꼬장부리고,
너도 참 성격 특이해.ㅋㅋ 그런 거 보면.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나길 원하지? 그래, 네 맘 알아.
너를 힘들게 하고, 눈물 흘리게 하는 남자 만나고 싶지 않은 거잖아. 그리고 니가 그렇게 꼬장 부려도,
매너 있게, 자기 꺼 다 참아가면서, 사랑하는 사람한테 맞춰주는 성격이란 것도 알아.
지금 우리랑 있을 때에도 너는 대장 노릇하면서 동시에 많은 사람들 비위 다 맞춰주고 있잖아. 매너 있게.
모두 다 행복하고, 불만이 있지만 말 못하는 약한 애들 마음 먼저 캐치해서 배려하고.
그래서 니가 대장이라는 거지. 우리 중에 제일, 사람 케어 잘 하고.
그런 애가 소개팅을 가서는 꼭 그렇게 꼬장을 부리더라. 만나서는 상대 맞춰주면서 얘기하다가
꼭 저렇게 주관이나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개입하는 사람이나 너에 대해 넘겨짚어 판단하는 사람 만났을 땐 곧장 곧바로
딱 얘길 하더라고.
그런 거 봤을 때 넌 진짜 외국인 같아.
외국에서 산 애같이.
자기 주관 뚜렷한 거 좋지. 남자한테 기대어 살 생각 안 하고, 일하고 싶어하고, 자기 자아실현 하고 싶어하고,
그러니 사짜 직업 가진 남자들 만나도 넌 눈하나 깜빡 안 하고 지 성격 꼴리는 대로 기분 나쁘면 차분한 말투로 퇴짜를
놓지. 그게 더 무서워 진짜 ㅋㅋㅋㅋ
모르는 사람들이야 니가 남들 비위 맞출 줄 모를 거다 라고 생각하는데,
너 매너 좋은데 뭐. 매너만 좋아? 좋아하는 사람한테 니꺼 다 포기하면서 살잖아.
안 그래도 돈 아껴쓰는 애가, 남자친구만 만나면 그 남자친구한테 생활도 다 맞춰서 살잖아.
그래도 포기 못하는 게 니 직업이잖아. 어떤 직업이 됐든. 그리고 니 자신.
니 자신을 잃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지.
네가 마음이 아프다고 할 때, 아픈 걸 한심하게 보지 않는 사람 만나야지.
아~ 야, 어제 순대국 먹었다고?
나도 좀 부르지 그랬냐. 토요일날 오케스트라 공연 잘 보고 와.
나는 니가 오케스트라 보러 간다는 거, 잘난체하려고 오케스트라 본다고 말하는 거 아니라는 거 아니까, 걱정하지 말고.
멋있는 것도, 스트레스 받아서 오케스트라 보는 게 불쌍한 것도, 잘난척 고급스러운 척 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아.
그냥 재밌게 잘 보고 와.
귀가 시원해지고 머리가 시원해질 거야.
야, 너 어쩌다 밥을 5분 안에 다 먹는 애가 됐냐.
예전엔 밥도 천천히 먹는 애였는데,
얼마나 그렇게 급박하길래, 뭐가 그렇게 너를 이렇게 만들었냐. 5분 안에 후딱 밥 먹고, 해치우고, 또 다른 무언가를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분초를 다투는,
원래도 에너지 넘치는 애였는데, 이렇게까지 여유없이 니 자신을 다그치진 않았었잖아.
넌 있는 그대로, 괜찮은 애야.
...........
해 지는 걸 구경하듯이, 그렇게 시간이 가는 걸 구경해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