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호기,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사랑의 피부에 미끄러지는 사랑의 말들처럼
수련꽃 무더기 사이로
수많은 물고기들이 비늘처럼 요동치는
수없이 미끄러지는 햇빛들
어떤 애절한 심정이
저렇듯 반짝이며 미끄러지기만 할까
영원히 만나지 않을 듯
물과 빛은 서로를 섞지 않는데
푸른 물 위에 수련은 섬광처럼 희다
문정희, 뼈의 노래
짧은 것도 빠른 것도 아니었어
저 산과 저 강이
여전히 저기 놓여 있잖아
그 무엇에도
진실로 운명을 걸어보지 못한 것이 슬플 뿐
나 아무것도 아니어도 좋아
냇물에 손이나 좀 담가보다
멈춰 섰던 일
맨발 벗고 풍덩 빠지지 못하고
불같은 소멸을 동경이나 했던 일
그것이 슬프고 부끄러울 뿐
독버섯처럼 늘 언어만 화려했어
달빛에 기도만 무르익었어
절벽을 난타하는
폭포처럼 울기만 했어
인생을 알건 모르건
외로움의 죄를 대신 져준다면
이제 그가 나의 종교가 될 거야
뼛속까지 살 속까지 들어갈 걸 그랬어
내가 찾는 신이 거기 있는지
천둥이 있는지, 번개가 있는지
알고 싶어, 보고 싶어, 만나고 싶어
이사라, 물거품
계곡에 앉아 무심히 눈길을 주면
작지만 단단한 인연에 걸려 넘어지는 물의 줄기를 보게된다
물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나오는 것이리라
아주 죽기도 힘들고
살아나오기는 더 힘든 사람들
물거품처럼 온몸이 부서져 돌아온다
오늘도 물거품 속에서
한 아이가 운다
길 없는 길이 아팠다고
한 엄마가 운다
길 아닌 길을 걸어왔다고
입양 간 아이가 이국의 발음으로 돌아와
고국의 저녁을 글썽거리게 한다
오늘도 협곡을 지나온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바라보는 바다는 먼 곳일수록 푸르고
물결치는 분노가 새처럼 배회하던 날들도 있었고
기억하는 냄새가 있는데
죽을 듯이 아파서 돌아가려는 사람이 기억 못 할 리가 있으랴
계곡의 밤은 더 깊고
어두운 것이 더 선명한 어둠을 품고
절망이 절망을 볼 수 없게 되면
쉽게 죽을 수 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이
물거품이다
양문규, 애기똥풀
산동네 돌담길 따라가다
꽃보다 먼저 사랑을 꿈꾸었으리
뒤척이는 몸 일렁일 때마다
사립문 금줄 타고 달빛에 젖었으리
옛날도 그 옛날도 그러했으리
해와 달 바뀌고
별이 바뀌었어도
노오란 꽃, 애기똥풀꽃
박해영, 불기산이 내게
내 머리꼭대기에 올랐느냐
머리꼭대기에 오른 네 어깨가
우쭐거리느냐
흘러내린 바지춤 고이고
흙 묻은 두 손바닥 깨끗이 털고
이제
산 발치 웅크린
작고 작은 둥지
네 미망의 꿈을 보아라
네가 비틀거린 비탈과
네가 기어오른 봉우리와
네가 밟아 뭉갠 질경이
귓가에 조잘거리던 종달이와 휘파람새와 네가 모를 새
그리고 비척일 때 손 잡아준
네가 장차 잊을 나무들
어깨에 힘을 빼고
발 아래
빠알간 양철지붕
소녀 가장의 눈물어린 꿈
꿈 속의 어머니를 보아라
허리가 잘린 나무둥치와
허리가 잘린 나무둥치에 둥지를 튼
운지 버섯
그리고 운지 버섯을 간질이는
투명한 바람에
이제 그만 고개 숙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