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임, 목련꽃 진다
아름다운 것이 서러운 것인 줄 봄밤에 안다
미루나무 꼭대기의 까치둥지
흔들어 대던 낮바람을 기억한다
위로 솟거나 아래로 고꾸라지지만 않을 뿐
바이킹처럼 완급하게 흔들리던 둥지
그것이 의지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이라고
의지 밖에서 흔들어대는 너
내 몸에 피어나던 목련꽃잎 뚝뚝 뜯어내며
기어이 바람으로 남을 채비를 한다
너는 언제나 취중에 있고
너는 언제나 상처에 열을 지피는 내 종기다
한때 이 밤, 꽃이 벙그는 소리에도 사랑을 하고
꽃이 지는 소리에도 사랑을 했었다
서러울 것도 없는 젊음의 맨몸이 서러웠고
간간이 구멍난 콘돔처럼 불안해서 더욱 사랑했다
목련나무는 잎을 밀어 올리며 꽃의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는 것일까
이 밤도 둥지는 여전히 위태롭고
더욱 슬퍼서 찬란한 밤 또 어디서
꽃잎 벙그는 소리 스르르
붉은 낙관처럼
너는 또 종기에 근을 박고 바람으로 불어간다
꽃 진다, 내가 한고비
진다
곽재구, 사랑이 없는 날
생각한다
봄과 겨울 사이에
무슨 계절의 숨소리가 스며 있는지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사이에
벌교 장터 수수팥떡과
산 채로 보리새우를 먹는 사람들 사이에
무슨 상어의 이빨이 박혀 있는지
생각한다
눈 오는 섬진강과 지리산 사이에
남과 북 사이에
은서네 피아노 가게와 종점 세탁소 사이에
홍매화와 목련꽃 사이에
너와 나 사이에
또 무슨
병은 없는지
생각한다
꽃이 진 뒤에도
나무를 흔드는 바람과
손님이 다 내린 뒤에도
저 홀로 가는 자정의 마을버스와
눈 쌓인 언덕길
홀로 빛나는 초승달 하나
또 무슨
병은 깊은지
류외향, 지금은 꽃 피는 중
꽃 피는 시간은 길고 길었으나
꽃들의 마음을 알지 못해
전 생애를 걸고 피는 꽃들을
자궁 밖으로 밀어내는 이 봄의 통증은
달을 헛짚어오는 월경처럼 어지러웠고,
저들이 이 세상의 허공에다 던진
아름답고 슬픈 투망에는
무엇이 건져질는지
발소리 삭인 채 다가와
앞질러 내달려가는 이 봄은
속수무책 피어나는 희망이어서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네
다만 우연이므로
이 봄에 내가 있는 것
그리고 그대를 그리워하는 것
돌아보면
꽃들의 꽃진 자리뿐이었으니
무엇을 이름하여 부를 수 있을는지
지금은 청량하게 눈 씻는 중
봄이 꽃피는 시간을 말갛게 바라보는 중
그리고 저 만개한 우연처럼 그대
내게 들키지 않으며
오고 가는 중
김상미, 민들레
너에게 꼭 한마디만
알아듣지 못할 것 뻔히 알면서도
눈에 어려 노란꽃, 외로워서 노란 꽃
너에게 꼭 한마디만
북한산도, 북악산도, 인왕산도 아닌
골목길 처마밑에 저 혼자 피어있는 꽃
다음날 그 다음 날 찾아가 보면
어느새 제 몸 다 태워 가벼운 흰 재로 날아다니는
너에게 꼭 한마디만
나도 그렇게 일생에 꼭 한 번 재 같은 사랑을
문법도 부호도 필요없는
세상이 잊은 듯한 사랑을
태우다 태우다 하얀 재 되어
오래된 첨탑이나 고요한 새 잔등에 내려앉고 싶어
온몸 슬픔으로 가득 차 지상에 머물기 힘들 때
그렇게 천의 밤과 천의 낮 말없이 깨우며 피어나 말없이 지는
어느 날 문득 내가 잃어버린 서정의 꿀맛 같은 예쁜 노란 별
너에게 꼭 한마디만
노향림, 프루스트의 숲에 가서
아직 가지 않은 길은 아름답다
누구든지 잠 못이루며
프루스트의 숲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그 길을 바라보리라
꿈속에서도
나무들은 말방울소리에
귀 열어놓고 잔다
저 은사시나무숲
숲은 은빛 바늘을 숨기고
바람 부는 대로
그 바늘들을 털어낸다
날은 어두워오고
눈 내릴 듯 흐린 날
나의 눈엔 눈물 얼비친다
오, 누구든지 한 사람
아는 사람을
만날 것같다
아직 가지 않은 길은 아름답다
누구든지 잠 못 이루며
프루스트의 숲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그 길을 바라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