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 식탁의 즐거움
식탁을 보라
죽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는가
그래도 식탁 위에 오른 푸성귀랑
고등어자반은 얼마나 즐거워하는가
남의 입에 들어가기 직전인데도
그들은 생글생글 웃고 있다
한여름 땡볕 아래 밭이랑 똥거름 빨며 파릇했던
파도보다 먼저 물굽이 헤치며
한때 바다의 자식으로 뛰놀던 그들은
데쳐지고 지져지고 튀겨져 식탁에 올라와서도
끊임없이 흔들리고 펄떡이고 출렁이고 싶다
그들은 죽어서 남의 밥이 되고 싶다
풋고추 몇 개는 식탁에 올라와서도
누가 꽉 깨물 때까지 쉬지 않고 누런 씨앗을 영글고 있다
이빨과 이빨 사이에서 터지는 식탁의 즐거움
아, 난 누군가의 밥이 되었으면 좋겠네
한영옥, 억새풀
후회 없다
후회 없다
되뇌이는 목소리
기어코 끝이 갈라지는 사이사이로
굵은 눈물방울 뿌옇게 번져간다
어쩔 줄 모르는 후회의 분광(分光)이여
흩날리는 진주빛, 아슴한 춤이여
억새풀 빗자루, 몇 자루 엮어야
뿌연 눈물길 정갈히 쓸어갈까
신현정, 희망
앞이 있고 그 앞에 또 앞이라 하는 것 앞에 또 앞이 있다
어느 날 길을 가는 달팽이가 느닷없이 제 등에 진 집을
큰 소리나게 벼락치듯 벼락같이 내려놓고 갈 것이라는 데에
일말의 기대감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래 우리가 말하는 앞이라 하는 것에는 분명 무엇이 있긴 있을 것이다
달팽이가 전속력으로 길을 가는 것을 보면
오정국, 약속된 것은
텔레뱅킹으로 계좌이체를 몇 번 하고 나니
월급이 바닥난다 약속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비가 오면 우산을 펴고
비가 오지 않아도
서둘러 신호등을 건너간다
모래알은 왜 물밑으로 흘러가나
말이 중얼거리니
몸이 따라가는 것
비 개인 앞마당의 지렁이 자국
제 몸 긁힌 흔적이
시라면, 저게
생이라면
약속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흙바닥을 기는 햇빛의 뱃가죽엔 흠집이 없는데
박정원, 동심초
어머니 가슴에 맺힌 종양을
병원에서 덮어버린 그날부터
아버지는 곡기를 끊으셨다
아버지
어머니 가시던 날 아침
어머니보다 먼저
꽃잎처럼 지셨는데
사막이란 사막은 죄다 우리 집으로 몰려와
웅성거렸다
꽃 두 송이가
같은 날 같은 시각
사막 한가운데
이슬처럼 맺혔다고
그런데 그 꽃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