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 나무를 붙잡고 우는 여자
언제나 밤이 오고, 잎들의 지문이
선명해지는 밤길을 걸어간다
지난날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는 열매의 맛이
아려온다, 꽃은 찢긴 살처럼 빛난다
새벽 두 시에 나무를 붙잡고 우는 여자
머리 위에 얹혀진 찬 달
김명인, 찰옥수수
평해 오일장 끄트머리
방금 집에서 쪄내온 듯 찰옥수수 몇 묶음
양은솥 뚜껑째 젖혀놓고
바싹 다가앉은
저 쭈구렁 노파 앞
둘러서서 입맛 흥정하는
처녀애들 날종아리 눈부시다
가지런한 치열 네 자루가 삼천원씩이라지만
할머니는 틀니조차 없어
예전 입맛만 계산하지
우수수 빠져나갈 상앗빛 속살일망정
지금은 꽉 차서 더 찰진
뽀얀 옥수수 시간들
황지우, 소나무에 대한 예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지표 위에서 가장 기품 있는
건목(建木); 소나무, 머리의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이성선, 반달
반은 지상에 보이고 반은 천상에 보인다
반은 내가 보고 반은 네가 본다
둘이서 완성하는
하늘의
마음꽃 한 송이
도종환, 깊은 물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그대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 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는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 여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