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순, 차 한 잔의 미학
미지의 창공 저 너머에서
사랑이 찾아온 날
우리는 차 한 잔
꽃 보며 마셨네
그 후로 나는 홀로
봄이 가고
그대가 없어도
고운 단풍 보며
차 한 잔 마실 수 있었네
기다리라
그리움에 가슴 저린 사람아
언젠가
또 다시
사랑의 맹세도
언약의 봄도
미지의 창공 저 너머에서
찾아오리라
나태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슬퍼할 일을 마땅히 슬퍼하고
괴로워할 일을 마땅히 괴로워하는 사람
남의 앞에 섰을 때
교만하지 않고
남의 뒤에 섰을 때
비굴하지 않은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미워할 것을 마땅히 미워하고
사랑할 것을 마땅히 사랑하는
그저 보통의 사람
채호기, 별과 수련
밤하늘은 어두운 연못
젖은 별처럼 수련은
검은 수면에 불을 켠다
흰빛
그것은 다이빙대에서 뛰어내리는 수영선수처럼
곧장 눈으로 뛰어든다
그 소란에 잠시 밝았던 눈이
다시 어두워진다. 술렁임도 멎고
다시 잠잠해진다
캄캄한 머리를 뒤적거리다
어디엔가 부딪히면
수련인가 하고 얼른
눈을 뜬다
유자효, 폭설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온 어린 노루
사냥꾼의 눈에 띄어
총성 한 방에 선혈을 눈에 뿌렸다
고통으로도
이루지 못한 꿈이 슬프다
박상순, 이 가을 한 순간
텅 빈 버스가 굴러왔다
새가 내렸다
고양이가 내렸다
오토바이를 탄 피자 배달원이 내렸고
15톤 트럭이 흙먼지를 날리며
버스에서 내렸다
텅 빈 버스가 내 손바닥 안으로 굴러왔다
나도 내렸다
울고 있던 내 돌들도 모두 내렸다
텅 빈 버스가 굴러왔다
단풍잎 하나
초침이 돌고 있는 내 눈 속에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