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permeate.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XOnJMSIpdmE
고형렬, 사랑이 아니고 다시 오리
이곳은 처음 온 것이 아닌 것 같다
처음 온 것이라면 이렇게 배운다고 해서 금방
익숙해질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어쩌면 수도 없이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셀 수 없는 그 모든 것이 모두
사랑이 아니고는 돌아오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그토록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 무엇 하나 네 웃음도
스스로 스스로라 말하지 않는다
저 덩굴장미의 꽃 한 송이가 그러하다는 것이니
이미 있는 것은 인이며 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이 아니고 다시 올 수 있겠느냐
장석남, 살얼음이 반짝인다
가장 낮은 자리에선
살얼음이 반짝인다
빈 논바닥에
마른 냇가에
개밥 그릇 아래
개 발자국 아래
왕관보다도
시보다도
살얼음이 반짝인다
유안진, 다보탑을 줍다
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을 주웠다
국보 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
석존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속에서 솟아나 찬탄했다는 다보탑을
두 발 닿은 여기가 영취산 어디인가
어깨 치고 지나간 행인 중에 석존이 계셨는가
고개를 떨구면 세상은 아무데나 불국정토 되는가
정신차려 다시 보면 빼알간 구리동전
꺾어진 목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
쓸모 있는 듯 별 쓸모없는 10원짜리
그렇게 살아왔다는가 그렇게 살아가라는가
박주택, 하늘로 가는 단칸방
방이 있다 그 방은 물에 젖어
시간에 떠 있다
늙은 어머니가 중풍으로 누워
수족을 움직이지 못하고
삼십 년을 넘게 건사해 온 장애 아들은
못에 노끈을 매고 있다
말 못하는 어머니, 사지를 뒤틀며
의자 위에 선 아들을 올려다본다
툭! 의자가 굴러가고
노끈에 목을 맨 아들이 컥컥거릴 때
그 온몸으로 쥐어짠 눈물의 힘으로
단칸방 하늘로 올라간다
조창환, 녹는 그릇
촛불은 불타지 않고
몸 맑게 가라앉힐 뿐
제 몸이 녹는 그릇인 줄을
알면서도 맑은 영혼은
고요한 시간에 샘이 된다
고요한 시간에 샘이 된 초는
피멍든 흔적 가라앉혀
빛을 만들고
그 빛으로 이슬 떨군 사람
길 비추어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