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금진, 지상의 방 한칸
다이얼을 돌리다 말고 땡그랑
백원짜리 동전처럼 떨어지는 사람들 이름을
그는 잃어버린다
시간도 자정능력을 잃어버린 자정
길 위의 모든 전화부스엔 손님이 끊겼을 것이나
머리통에 환하게 불 켜진 채
갈 곳을 찾지 못한 이들은
칸칸이 유리문 닫고 담배를 피운다
하늘 꼭대기에서 보면 어둠속 전화부스는
이름 없는 사내들의 별자리
담뱃불처럼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얼굴을
마침내 제 품속에 문질러 꺼버리고는
그는 쭈그리고 앉는다
수화기에 대고 텅 빈 노래를 불러본다
이따금 술취한 이들과 눈 마주치지만
교신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버스도 다니지 않는 밤이면
길은 저절로 끊어진다
나 여기 다녀간다, 여기서 하룻밤 살았다, 중얼거리며
그는 눈물 같은 건 흘리지 않는다
수화기를 꼭 붙들고 그는 혼자 통화중이다
아무도 그의 전화를 받지 못한다
어둠이 끌고 올라가는 지상의 방 한칸 속에
그가 환하게 불 켜져 있다
조병완, 부드러운 명멸(明滅)
빗속에 서있다
새벽 속에 서있다
도시 속에 서있다
이 도시의 도로 위에 새벽 속에 빗속에
나는 흔들리는 윤곽으로 젖고있다
흐르는 빗물 위에 나를 던진다
던져진 나는 핑계를 대다가 흘러간다
빗속에 어제 밤과 새벽이 흐른다
내 고향과 도시가 섞여 흐른다
경계를 지우는 것은 비가 아니다
나는 비를 던지지 못하지만 비는 나를 던진다
카페가 나를 던지고 사라진다
가로수가 친구들이 택시가 사라진다
마로니에공원이 사라지고 못 지킨 약속이 사라진다
한밤중 술 취해 전화하던 첫사랑이 사라진다
우울한 책상이 나를 던지고 사라진다
예매한 기차표가 내일이 사라진다
사라진 것들은 망연한 표정으로 나타난다
이 도로가 새벽이 내 윤곽이 빗속에
나타났다간 망연히 사라진다
김현승, 절대고독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 끝에서
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 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 나의 시는
이성선, 문답법을 버리다
산에 와서 문답법을
버리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이제는 이것뿐
여기 들면
말은 똥이다
신용목, 소사 가는 길, 잠시
시흥에서 소사 가는 길, 잠시
신호에 걸려 버스가 멈췄을 때
건너 다방 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내 얼굴 속에서 손톱을 다듬는, 앳된 여자
머리 위엔 기원이 있고 그 위엔
한 줄 비행기 지나간 흔적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오후
차창에도 다방 풍경이 비쳤을 터이니
나도 그녀의 얼굴 속에 앉아
마른 표정을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당신과 나는, 겹쳐져 있었다
머리 위로 바둑돌이 놓여지고 그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