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화, 가난한 꽃편지
개망초 까마중이 애기나팔꽃 며느리밑씻개
내 삶보다 환한 꽃 피어 차마 뽑아낼 수 없습니다
캄캄하게 누워 뒤척이다 일어난 자리 돌아보니
시 한 편 드러누울 만합니다
철근쟁이 스물몇해 사람노릇 못하여
시가 될 말 한마디 챙기지 못했습니다
녹슨 쇠토막 갈고 닦아 서둘러 만든 말
세우고 엮어 시를 짓습니다
사는 일 느을 하루살이
새벽밥 먹고 나가 돌아오지 못한 내 목숨
대충 헤아려도 수천입니다
지금 나가면 또 한목숨 버려질 일
마음 급하여 비뚤어지고 어긋납니다
아 참, 노동이 마지막 남은 삶의 끈입니다
새벽밥 한 그릇이 노동의 시작입니다
열어본 밥통에 밥이 없습니다
새벽밥 지어야겠습니다
짓던 시를 버립니다
개망초 까마중이 애기나팔꽃 며느리밑씻개
환한 꽃이나 우거지겠습니다
이기철, 생의 노래
움 돋는 나무들은 나를 황홀하게 한다
흙 속에서 초록이 돋아나는 걸 보면 경건해진다
삭은 처마 아래 내일 시집 갈 처녀가 신부의 꿈을 꾸고
녹슨 대문 안에 햇빛처럼 밝은 아이가 잠에서 깨어난다
사람의 이름과 함께 생애를 살고
풀잎의 이름으로 시를 쓴다
세상의 것 다 녹슬었다고 핍박하는 것 아직 이르다
어는 산 기슭에 샘물이 솟고
들판 가운데 풀꽃이 씨를 익힌다
절망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지레 절망을 노래하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꽃잎 하나씩은 지니고 산다
근심이 비단이 되는 하루, 상처가 보석이 되는 한 해를
노래할 수 있다면
햇살의 은실 풀어 내 아는 사람들에게
금박 입혀 보내고 싶다
내 열 줄 시가 아니면 무슨 말로
손수건만한 생애가 소중함을 노래하리
초록에서 숨쉬고 순금의 햇빛에서 일하는
생의 향기를 흰 종이 위에 조심히 쓰며
이덕규, 꽃꿈
꿈속에서 활짝 핀 꽃을 보면
다음날 몸에 상처 입었네
사는 게 사나워질수록 꿈에
만개한 꽃밭 자주 보였는데
몸 곳곳에 핀, 그
크고 작은 선홍빛 꽃잎들
꿈땜처럼 마를 때, 나는 정말
자주 자주 들판으로
이름 모를 들꽃들 보러 나갔네
오,누가 어디 먼데서
쓰라린 마음의 찰과상을 입고
헤매이다 지쳐 쓰러진
험한 꿈이
여기 이렇게 문득
생시로 피어났을까
어느 메마른 이가 이토록
향기로운 꽃꿈을 선뜻 척박한
내 몸에 대고 꿔 주었을까
지난밤 꽃피던 통증이
그저 봄바람처럼 맑아져서
들판에 앉아 하염없이
흰 붕대를 풀어내는, 나는
지금껏 누굴 위해
좋은 꿈 한번 꿔 주지 못하고
어디 먼데
꿈속의 꽃밭이나
사납게 찾아 헤매는 사람
기형도,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가라, 어느덧 황혼이다
살아 있음도 살아 있지 않음도 이제는 용서할 때
구름이여, 지우다 만 어느 창백한 생애여
서럽지 않구나 어차피 우린
잠시 늦게 타다 푸시시 꺼질
몇 점 노을이었다
이제는 남은 햇빛 두어 폭마저
밤의 굵은 타래에 참혹히 감겨들고
곧 어둠 뒤편에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우리는 그리고 차가운 풀섶 위에
맑은 눈물 몇 잎을 뿌리면서 낙하하리라
그래도 바람은 불고 어둠 속에서
밤이슬 몇 알을 낚고 있는 흰 꽃들의 흔들림
가라, 구름이여,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이제는 어둠 속에서 빈 몸으로 일어서야 할 때
그 후에 별이 지고 세상에 새벽이 뜨면
아아,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우리는
서로 등을 떠밀며 피어오르는 맑은 안개더미 속에 있다
천양희, 밥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